이승만과 임시정부
- 최초 등록일
- 2011.12.03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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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전공 대학원생 자료입니다.
이승만과 임시정부에 관한 연구서 2~3권을 요약하였습니다.
목차
1. 갈등기(1919~1925)
(2) 이승만의 상해 방문
(3)국민대표회의 개최
2. 단절기 (1925~1941)
(1) 상해임정의 대통령 탄핵
(2) 구미위원부 폐지령
(3)주미재무 및 외무행서 설치
3. 협력기 (1941~1945)
1) 주미외교위원부 인준
본문내용
상해임정과 이승만의 갈등요인은 이승만의 임정에 대한 태도, 임정의 이승만에 대한 태도를 살핌으로써 확인할 수가 있다. 먼저 이승만이 1920년 3월 6일 상해의 金秉祚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승만의 임정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이승만은 임정이 프랑스 조계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을 염두하여 임정을 ‘유형무적’한 정부, 즉 외형적으로 정부 형태를 갖춘 것보다 조직을 간편하게 하여 내실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며 동서와 내외, 즉 遠東과 구미 그리고 국내와 국외 민족운동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결정적인 기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임정의 임시대통령인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1920년 1월28일 이동휘에게 보낸 편치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편지에서도 이승만은 원동에서는 최후운동인 무력투쟁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자신은 미국에서 선전활동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이승만에게 ‘친미’외교노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독립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한편 상해임정은 이승만의 활동기반인 구미위원부를 합법적 기구로 인정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구미위원부 설치 당시 이승만이 임정과 협의하지 않았고 후에도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임정이 당면한 재정확보의 문제, 외교권의 문제가 실질적 이유였다.
당시 상해와 국내, 만주와 노령에서 자금조달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임정 성립초기부터 미주한인사회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1만명 정도의 교민이 경제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안정되고 임정 지원에도 열성적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여 미주지역의 재정권을 장악하자 임정은 구미위원부를 통해서만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