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협상, 반탁
- 최초 등록일
- 2023.02.07
- 최종 저작일
- 2023.02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목차
없음
본문내용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경찰의 방조를 받은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여운형의 죽음은 미소공위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미국은 8월 28일 미,소,영,중 4대국 회의를 제안하여 분단의 국제적 수순을 밟았다. 예상했던 대로 소련이 거부했고, 미 국무장관 마셜은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서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9월 23일 유엔총회는 한국문제의 유엔총회 상정안을 가결했다.
그러자 소련은 역습을 가했다. 9월 26일 미소공위소련 수석대표 스티코프는 1948년 초까지 미,소 양군의 한국 철수를 제안했고, 소련의 유엔 대표는 한국문제 토의에 한국인을 초청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유엔은 미국의 거수기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련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11월 14일 열린 유엔총회는 유엔감시하의 남북 총서건안을 43대 0(기권6, 결석8)으로 결의했고, 이 결의에 따라 8개국 대표로(처음에는 9개국이었으나 우크라이나공화국이 불참했다. 남북 총선거를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했다. 유엔에서 한국문제가 숨가쁘게 진행될 때 국내 정치세력은 각자 다른 길을 걸었다. 김구는 유엔의 활동을 지지하면서 이승만,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과의 단합을 모색했다.
참고 자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초판22쇄
<한국사통론> 삼영사, 2005년 4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