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김중혁 작가의 다섯번째 소설집. 예외적인 존재들의 삶과 더불어 죽음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진중하게 다룬다. 작가 특유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문체를 잃지 않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숙명으로서의 죽음과 거기서 비롯되는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한다. 불가해한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을 향한 작가의 애정...
데이브 한의 아버지는 끊임없이 이런저런 화제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러나 데이브는 아버지의 말 중에 믿는 것도 있었고 믿지 않는 것도 있었다(p. 163). 그리고 아버지의 이야기에 대해서 사실 여부는 확인해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일종의 기표이다. 그리고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다면 면에서 아버지의 이야기-사실의 관계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로 등치해볼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1966년 작인 데칼코마니(Decalcomanie)는 기표란 기의의 흔적에 불과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잘 담아냈다. 왼쪽에 보이는 사람의 흔적은 바다의 풍경을 비추고 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오른쪽 사람을 내면적 관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흔적에 불과한 오른쪽의 기표가 현실을 더 잘 반영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나 혼자 남겨졌을 때, 우리는 남들 앞에서 하지 않는 행동을 서스럼없이 한다. 가령 “손으로 발가락을 긁”는 다거나, “화장을 하나도 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꾸밈도 없이 행동한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홀로 있는 사람들’은 매우 침착하고, 표정이 없다. 보일 사람이 없기에 애써 표정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공간은 비행기이다. 마음대로 내릴 수 없는 공간이다. 심지어 죽게 되더라도, 착륙할 때까지 시체인 채로 비행해야 한다. “탈출구가 없는 로켓”에 올라탄 사람들은 “벌거벗은” 것처럼 행동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에 갇혀 있는” 공간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그런데 이 공간에, 마약을 운반하기 위해 탑승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연스럽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웃거나, 심지어는 무표정으로 있더라도 그 자신은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짧게 언급했듯, 이 소설은 마약을 몸 속에 넣어 운반하는 ‘데이브’가 비행기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잭’을 만나고서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