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극][한국 신파극][일본 신파극][공연][신파극의 의의][일본의 신파극][한국의 신파극][한국과 일본의 신파극 비교]신파극의 의의와 일본의 신파극, 한국의 신파극 고찰 및 한국일본의 신파극 비교 분석(신파극)
- 최초 등록일
- 2009.03.10
- 최종 저작일
- 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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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파극의 의의와 일본의 신파극, 한국의 신파극 고찰 및 한국일본의 신파극 비교 분석
목차
Ⅰ. 신파극의 의의
Ⅱ. 일본의 신파극
1. 대본의 확보와 각색의 전문성
2. 일본 신파극 공연과 가정소설
Ⅲ. 한국의 신파극
1. 무화된 연극전통과 타율성
2. 관주도의 연극 개량
Ⅳ. 한일 신파극의 비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신파극의 의의
1910년대는 신파극의 시대이다. 1910년대는 그 어떤 문학예술 장르보다도 신파극이 압도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며 모든 문예 활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의 신파극에 대해서는 뚜렷한 근거 없이 단순히 일본 신파극의 모방 또는 이식이라는 전제 아래 그 긍정적인 의미 규정의 작업은 외면해 온 것이 학계의 현실이다.
분명 신파극은 일본의 공연 양식이며 한국의 신파극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하였다. 일본의 신파극은 일본뿐 아니라 190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빈번히 공연되었다. 물론 한국의 문예 종사자들이 일본의 신파극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자료가 없어 뚜렷이 규정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1906년 문예협회의 제1회 공연이 있고 나서도 1911년 일본 신파극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천상음이랑이 사망할 때까지 명치기는 분명히 신파극이 공연의 중심 양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파극은 1903년 천상음이랑이 를 번안하여 공연하고 일본 근대극의 대부격인 소산내훈이 1904년 신파극 활동에 가담할 정도로 서양의 근대극을 섭취하며 발전하였다.
따라서 1900년대 전성기를 구가한 일본의 신파극이 1910년대 한국에서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며, 한국의 신소설이 이 시기에 구태를 벗고 근대소설로 전환한다고 하는 점은 필경 양자간에 어떤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나라간의 문화의 흐름은 거부할 수 없고, 특히 막 식민지로 편입된 한국의 현실에서 종주국의 문화를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은 그 누구도 쉽게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Ⅱ. 일본의 신파극
1. 대본의 확보와 각색의 전문성
일본 신파극의 발생과 발전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는 모든 일본 근대연극사의 명치기 연극에 관한 설명에서 충분히 서술되어 있는 상황이므로 본고에서는 상론하지 않는다. 다만 신파극에 대하여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대본의 부재, 즉 신파극이 대본 없이 배우들의 즉흥적인 연기에 의존하는 ꡐ구찌다데(口立)ꡑ식의 방법으로 공연되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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