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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09.03.01
- 최종 저작일
- 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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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의 도시계획, 로마의 건축, 로마네스크 건축, 로마의 콜로세움과 검투사, 로마의 장례문화, 로마의 음악, 로마의 멸망 분석
목차
Ⅰ. 개요
Ⅱ. 로마의 도시계획
1. 로마의 도시계획
2. 로마
3. 로마의 지방도시
1) 식민도시(colonia)
2) 병영도시
3) 상업도시
Ⅲ. 로마의 건축
Ⅳ. 로마네스크 건축
Ⅴ. 로마 콜로세움과 검투사
Ⅵ. 로마의 장례 문화
1. 임종땐 교회 조종(弔鍾). 망자 관할 시경운영
2. 공동묘지 값 단일화
3. 종교 통해 죽음 극복
Ⅶ. 로마의 음악
Ⅷ. 로마의 멸망
참고문헌
본문내용
로마의 역사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 1단계는 공화정의 시대로 통일국가의 형성기이고, 제 2단계는 세계국가의 형성과 공화정의 붕괴이며, 제 3단계는 로마제국의 전성기로 제정이 시작된 때로부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이다. 로마 역사의 1단계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이었다. 기원전 8세기경 이탈리아 중부지역인 라티움 평야에 정착한 원주민인 파트리키(patrici)들은 도시국가를 형성하여 오다가 기원전 510년에는 왕의 강권에 못 이겨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의 7번째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추방하고 로마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1백인 대회의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된 2명의 집정관이 최고의 직위를 차지하였는데, 2명이 한 달씩 번갈아가며 집무할 뿐 아니라 상호간의 완전한 합의가 필요했으므로 그 이전의 왕보다 권력이 약하였다. 더욱이 집정관도 범죄를 범하면 임기 전에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했다. 그러나 로마는 불완전하게나마 민주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국민단합이 가능하였고 또 반도를 통일하기에 적합한 국내외적 여건을 잘 이용할 수가 있었다. 당시의 로마의 인민들은 귀족, 평민, 노예의 3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귀족은 파트리키족으로 씨족 10개 단위로 1개 쿠리아(curia)를 만들고, 다시 10개의 쿠리아가 1개의 트리부스(tribus)를 만들었는데, 트리부스는 모두 3개였다. 따라서 파트리키 씨족의 장로 3백 명이 원로원을 구성하였다. 모든 성년 남녀는 각 쿠리아에서 집회를 열고, 대표 선출, 선전 포고, 강화 조약의 체결 등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평민들은 트리부스라고 하는데, 이들은 파트리키에 소속되지 않은 로마 공동체에 의하여 정복된 종족으로 자유민이긴 했으나 시민권은 없으며 민회에 출석할 권리도 군무를 맡을 권리도, 파트리키의 종교의식에 참여할 권리도 없었다. 또한 파트리키와의 결혼도 허용되지 않았다. 노예는 전쟁포로로서 이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부족간의 전쟁이 잦아짐에 따라 평민들의 세력은 강화되어서 귀족과 평민의 신분투쟁은 자주 벌어졌는데 귀족들은 평민들에게 호민관의 선출권을 줌으로써 양자간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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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역 / 로마인 이야기, 한길사
에드워드 / 로마제국쇠망사7, 대광서림, 1992
지동식 / 로마제국은 왜멸망했는가?, 대학출판사, 1982
황건 역 / 로마제국 쇠망사, 까치,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