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임나일본부)
- 최초 등록일
- 2009.01.04
- 최종 저작일
- 2009.01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廣開土大王陵碑에대해서 포괄적인 내용과 역사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파해쳐보고자한다.
(릉,비,임나일본부)
당연히 성적은 A+
목차
Ⅰ.廣開土大王陵碑
Ⅱ. 廣開土大王陵碑의 再發見
Ⅲ. 廣開土大王陵碑에 대한 論難
◈ 廣開土大王陵碑 分析
본문내용
1899년 이전 어느 해에 비문 변조 은폐를 위해 석회를 발랐다는 이야기다. 이진희의 저서 <광개토왕릉비 탐구>를 보면 석회도포가 일본의 주장에 따라 원비문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라 사카오의 탁본을 보강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탁본을 목적으로 석회를 발랐다면 비문을 추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게다가 석회를 바른 시기는 1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무렵 탁본이 현지에서 매매대상이 아니었다. 탁본이 현지에서 매매의 대상이 된 것은 일본인이 그것을 한창 사들였던 1909년 이후였다. 따라서 탁본 수요가 없었던 1899년대 선명한 탁본을 만들어 비싸게 판매하기 위해 석회를 바른다는 것은 실제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또한 신묘년 기사에서 래도해파(來渡海破)의 넉자는 조작된 글자이므로 기존해석은 모두 타탕하지 않으며 이것이 원상복구 되기 전에는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학계엔 엄청난 충격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이진희 씨의 석회도포설은 현재는 설득력을 많이 상실하였다.
6) 이진희의 가설에 대한 반박
⇒ 일본측
▷ 제5기 (오늘날의 연구)
* 주요 연구자 : 사까이 카이조오, 미마쯔 야스까즈, 미즈따니 테이지로오, 나까쯔까 아끼라, 사에끼 아리끼요, 후루따 타케히코 등
* 연구의 특징 : 호태왕비문 연구의 재검토기, 호태왕비의 연구가 참모본부에서 이루어진 것, 사코 카게아키가 쌍구가묵본을 가져온 것, 그리고 호태왕비는 개찬되었다는 이진희설 및 후루따의 반론과 재검토가 실증적으로 개시되었다.
? 1972 년 11월 12일 동경대 사학회대회 후루따 타케히코 `호태왕비문 개삭 설의 비판`
? 1973 년 `호태왕비문 개삭 설의 비판-이진희씨 `광개토대왕릉비의 탐구`에 대해서(`사학잡지` 제82편 8월)
⇒ 왕건군의 주장 (중국의 사학자)
-석회를 칠한 것은 일본 군인이 아니라 중국의 탁공이 탁본의 편의를 위해 한 것이다.
참고 자료
고대로부터의 통신 |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 푸른역사 | 2004.01.05
광개토대왕비 | 이봉호 | 우일출판사 | 1991.08.01
광개토대왕비 | 변영문 | 이화문화출판사 | 1999.11.08
광개토대왕비와 한일관계 | 한일관계사연구논집편찬위원회 | 경인문화사 | 2005.06.05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 김병기 | 학고재 | 2005.05.30
만들어진 고대(근대 국민 국가의 동아시아 이야기) | 이성시 | 박경희 역 | 삼인 | 2001.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