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당원정기
- 최초 등록일
- 2008.11.18
- 최종 저작일
-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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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중에
발해의 당원정기를 알고 싶은 분
목차
1. 발해(渤海)의 개국과 발전
2. 발해 무왕(武王)때의 대외 관계
가. 당(唐)
나. 신라(新羅)
다. 일본(日本)
3. 발해의 당나라 원정
가. 전쟁의 배경
나. 전쟁의 진행
4. 전쟁이후의 발해
5. 함께 생각해 봅시다.
가. 대문예는 왜 발해를 저버렸는가?
나. 장문휴 장군은 왜 직접 장안으로 입성하지 않았을까?
다. 당과 신라의 병력은 정말로 얼어 죽었을까?
라. 문왕이 아버지 무왕을 따라 당을 다시 한 번 공략 했더라면...
본문내용
1. 발해(渤海)의 개국과 발전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지금의 조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도독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틈을 타 대조영은 고구려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오는 당군을 천문령(天門嶺)전투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 부근의 동모산 기슭에 진국(震國:振國)을 세웠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거란·해 등의 압력으로 요하유역과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작을 수여하였는데, 이로부터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서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 이었다는 ≪구당서≫의 기록과, 속말말갈인(粟末靺鞨人)이었다는 ≪신당서≫의 기록이 병존한다. 종래 이 때문에 이를 둘러싼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반면, 한국 측의 기록인 ≪신라고기(新羅古記)≫, ≪제왕운기(帝王韻記)≫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라고 표기하였다. 대조영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대조영이 죽은 뒤 대무예(大武藝)가 2대 무왕(武王)에 즉위하였다. 그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정하고,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북동방면의 여러 종족을 정복하였다.
참고 자료
1. 역사서 : ≪삼국사기≫(김부식, 1573년),
≪신당서≫(1044~1060년),
≪구당서≫(940~945년),
≪자치통감≫(사마광, 1084년)
2. 현대의 책 : ≪발해의 대외관계사≫(한규철, 1994년, 신서원),
≪발해사≫(박시형, 1999년, 이론과 실천),
≪발해의 역사≫(왕승례 저, 송기호 역, 1988년, 한림대학교 출판부),
≪민족사를 바꾼 33명의 무장들≫(황원갑, 2004년, 인디북)
3. 인터넷 사이트 : 네이버 지식검색, 구글, 엠파스, 알타비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