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의 교육 사상
- 최초 등록일
- 2008.11.16
- 최종 저작일
-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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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황의 생애, 철학, 교육관 등을 알아본다.
목차
1. 생애
2. 사상
1)이기론(理氣論)
2)심성론
3)인간관
3. 교육관
1)경(敬)의 의미
2)교육의 목적과 방법
3)교육의 내용과 특징
4. 현대적 의미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생애
퇴계(退溪) 선생은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퇴계의 부친은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 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훗날 퇴계도 “자신이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분은 어머니라고 하였다. 6살 때 이웃집 노인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일종의 소화불량)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 기였다.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 기였으며,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후서 고봉 기대승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쟁, 주자사절요, 자성록, 전습록논변, 성학십도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다.
참고 자료
이해영 「퇴계 사단칠정론의 논거에 관한 검토」한국유교학회 1988
허직 「퇴계 이황의 이기호발사상연구」한국장서가회 1995
정덕희 「퇴계 이황(李滉)의 인간형성이론-거경궁리를 중심으로」교육철학회 1998
윤용남 「퇴계의 이황(李滉)의 사도관(師道觀)」퇴계학연구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