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만파식적에 대한 강독 및 분석, 역사적 배경 등이 자세합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본 문
1. 원문
2. 강독 및 분석
3. 만파식적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4. 신문왕대 전제왕권
1) 정치적 측면
2) 경제적 측면
Ⅲ. 맺음말
♡ 참고자료 ♡
본문내용
2. 강독 및 분석
弟三十一神文大王, 諱政明, 金氏. 開耀元年辛巳七月七日卽位. 爲聖考文武大王創感
제 삼 십 일 신 문 대 왕, 휘 정 명, 김 씨. 개 요 원 년 신 사 칠 월 칠 일 즉 위. 위 성 고 문 무 대 왕 창 감
恩寺於東海邊(寺中記云. 文武王欲鎭倭兵, 故始創此寺, 未畢而崩, 爲海龍. 其子神文
은 사 어 등 해 변 ( 사 증 기 운. 문 무 왕 욕 진 왜 병, 고 시 창 차 사, 미 필 이 붕, 위 해 룡. 기 자 신 문
立, 開耀二年畢排. 金堂砌下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旋繞之備. 蓋遺詔之藏骨處, 名
립, 개 요 이 년 필 배. 금 당 체 하 동 향 개 일 혈, 내 룡 지 입 사 선 요 지 비. 개 유 지 지 장 골 처, 명
大王岩, 寺名感恩寺, 後見龍現形處, 名利見臺.)
대 왕 암, 사 명 감 은 사, 후 견 룡 현 형 처, 명 리 견 대.)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이요, 성은 김씨다. 개요 원년 신사(681)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문무대왕 재위기간 681~692.을 위해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를 지었다.(절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해서 이 절을 짓다가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시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에 공사를 마쳤다. 금당 섬들 아래 동쪽으로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는데,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유언에 따라 유골을 모신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 했다고 한다.)
→ 여기에 등장하는 감은사에 대해서 많은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첫째는 ‘감은사를 지은 숨은 의도가 있었다.’ 라는 견해다. 감은사는 현재 경북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대왕암과 이견대가 있는 양북면 봉길리나 감포읍 대본리 앞 바다는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이런 곳엔 의당 성곽이나 군사시설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이곳에 군사시설이 아닌 사찰을 지었다. 그 이유는 감은사는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가진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반영하여 창건된 사찰로써
참고 자료
- 일연, 『삼국유사』
- 김부식, 『삼국사기』
- 이범교, 『삼국유사의 종합적 해석』, 민족사, 2005.
- 고운기, 양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현암사, 2002.
- 신종원, 『삼국유사 새로 읽기(1)』, 일지사, 2004.
- 일연 지음/ 리가원, 허경진 옮김, 『삼국유사』, 한양출판,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