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입문
- 최초 등록일
- 2008.09.01
- 최종 저작일
-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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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사 입문
목차
은왕조의 문화
분서갱유(焚書坑儒)
신구법당의 대결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은왕조의 문화
중국 『사기』에 황제(黃帝)전욱(頊)제곡(帝)제요(帝堯)제순(帝舜)의 다섯 황제가 사적이 기록되어 있고, 그 후 황하 치수에 공이 있는 우(禹)가 하왕조(夏王朝)를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증명할 사료가 없어 전설로 여겨지고 있다. 은 또한 전설로 판단되다가 1899년 갑골문자의 해독이 시작되고 1929년 이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어 은왕조의 실재가 밝혀지게 되었고 중국의 첫 왕조로 여겨지고 있다. 은왕조는 3기로 구분되지만 전 중기에 대해 『사기』에 실려 있는 왕의 계통과 유적, 그 출토품 이외의 사료는 없다. 후기에 이르러 은대 사회의 구조, 왕제의 실체에 대해 알려주는 사료는 약간 있다.
그 첫 번째가 갑골문자이다. 귀갑과 수골의 표면에 기록된 복사(卜辭)인데 정인(貞人)이라는 복관(卜官)이 외정(外征)의 성패 작물의 풍흉, 수렵의 다과 등을 점칠 때 기록된 글이다. 두 번째는 금문(金文)이다. 금문은 청동기에 새겨진 문자이다. 즉 왕으로부터 상을 받은 족장이 왕의 조선을 제사지내는 제기인 청동기를 만들고 그 표면에 제기를 만든 경위를 새긴 글이다. 세 번째는 지하무덤과 여기서 나온 출토품이다. 특히 왕 또는 왕족의 것으로 생각되는 많은 순장자(殉葬者)를 동반한 큰 무덤이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얻어진 결론은 차이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첫째 사회의 기본단위는 읍이라는 집단 부락인데 이는 혈연관계에 의해 맺어진 일종의 씨족공동체였다. 그리하여 읍 상호 간에 종속관계가 있었는데 왕족이 거주하는 왕도(王都)가 대읍(大邑), 이에 종속하는 씨족의 읍이 족읍(族邑), 다시 이에 속읍(屬邑)이라는 소읍이 종속한다는 겹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사기』에 의하면 왕위계승에 대해 후기의 전반까지는 형제상속, 이후가 부자상속이지만 이 형제는 거의 생모를 달리하고 있어 의제화된 부자관계가 설정되고 있음을 고려하면 왕위계승도 혈연관계가 아닌 족장간의 교체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참고 자료
<서병국, (2005년), 아시아의 역사, 한국학술정보(주)>
<두산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