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배경
목차
1. 머리말
2. 학살 배경
1) 계엄령 선포
2) 유언비어 유포
3) 자경단 선동
3. 맺음말
- 참고문헌 -
본문내용
1. 머리말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44초, 동경 139.3도 북위 35.2도 사가미만(상모만) 북부를 진앙지로 진도 7.9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엄청난 위력의 지진은 관동 간토, 칸도, 칸토, 간또 등으로 불리며 그 중 간토[Kantô(관동)]가 대표적이지만 중국에 위치한 간도(간도)가 간토로 불리는 경우가 있어 여기에서는 관동으로 통일하도록 하겠다. 일본 중부에 있는 지방으로 도쿄와 사이타마 현(기옥현)ㆍ지바 현(천엽현)ㆍ이바라키 현(자성현)ㆍ도치기 현ㆍ군마 현(군마현)ㆍ가나가와 현(신나 천현) 일대를 이르는 말이다.
전역을 휩쓸면서 도쿄를 비롯한 수도권 일대를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었고 화재가 겹쳐 최대의 피해를 입었다. 이 지진에 의한 피해는 사망자 9만 9,331명, 부상자 10만 3,733명, 행방불명 4만 3,746명, 가옥 전파 12만 8,266호, 가옥 반파 12만 6,233호, 소실가옥 44만 7,128호, 유실가옥 868호이며 이재민은 약 340만 명이라고 한다. 이홍직 외,『국사대사전』3, 지문각, 1968, 강덕상, 「1923년 관동대진재(대진재) 대학살의 진상」, 『역사비평』45, 1998, 11, 58쪽, 재인용.
현재 일본에서는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지정해 이날이 가까워지면 언론계와 행정기관에서 각 가정에 피난용구, 긴급식량 준비 및 점검을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날을 단순히 자연재해의 공포를 상기하는 날로만 지낼 수는 없다. 지진 후 극심한 혼란을 야기 시킨 범인을 조선인이라 간주하며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조선인 대량학살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이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은 조선인이 지진 후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방화하고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유언비어로 인해 자행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목격하지도 못한 소문만으로 이러한 대량학살이 가능할지 의구심이 든다. 이에 본고에서는 관동대지진 후 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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