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명문기와의 내용과 공장
- 최초 등록일
- 2008.07.01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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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시대 명문기와의 내용과 내용에서 보이는 공장들의 활동을 정리하였습니다.
목차
1. 머리말
2. 기와의 제작과 유통
3. 명문기와의 내용과 장인
4.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한반도에서 기와는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어왔으며 이를 증명하듯이 전국 각지의 여러유적에서는 많은 기와가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기와들 가운데에는 여러 종류의 ‘銘文’이 새겨져있다. 명문의 내용은 연호(간지), 사용처, 제작자, 공급자 등으로 요약되며, 내용을 통해서 기와가 사용된 수급처와 사용연대를 밝히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문헌기록에는 그 존재가 기록되어있지만 현재 그 위치를 비정할 수 없거나 그 존재를 전혀 인식할 수 없었던 유적의 존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명문기와에서는 실제작자 또는 제작에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匠人의 人名이 출토되고 있어 관심이 주목된다.
이글에서는 寺址또는 建物址에서 출토되는 명문기와의 내용을 살펴보고 명문내용에서 보이는 瓦匠의 존재를 복원하고자 한다.
2. 기와의 제작과 유통
고려의 수공업체제는 관영수공업, 공납수공업(所수공업), 민간수공업으로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국가는 제도적인 집권화 과정에서 工匠案을 작성하고, 그 이전의 궁정수공업의 형태를 흡수하여 중앙과 지방에서의 관영수공업체제를 성립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기와의 제작에 관해서는 『고려사』식화지 녹봉 諸衙門工匠別賜 條에는 10개 수공업 관청에서 관할하는 61가지 업종, 96명의 상층 수공업자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는 수공업 분야가 세분되어 있지만 瓦匠에 대한 언급은 찾아 볼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權務官祿 條에서 諸窯直 및 六窯直에게 녹봉을 책정한 기사를 통해 중앙에서도 기와를 굽는 가마를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전기에 공납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행정구역이었던 所에서도 瓦所가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官需官給의 형태를 띠는 기와제작은 그 양적 한계로 인하여 민간에서의 수요는 일시적으로 가마를 설치하거나 寺院에서 공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민간에서 운영한 私窯의 대표적인 예는 건물지 근처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이는 해당 건물의 營繕에 필요한 기와를 직접 굽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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