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정치제도]신분제 중심의 귀족정치
- 최초 등록일
- 2008.06.01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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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시간에 쓴 신라의 정치제도 발표문입니다.
목차
1. 신라의 통치조직
1) 중앙행정제도
2) 지방행정제도
2. 군사제도
3. 화백제도
4. 골품 제도
본문내용
3. 화백제도
신라의 정치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현상은 그것이 합의제도에 의해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회의체를 화백이라고 불렀다. 그 기원은 연맹왕국시대의 정사당 혹은 남당이라는 제도에서 기원하고 있다. 이 제도가 비교적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의장으로서의 상대등직이 설치된 이후부터라고 추정된다. 이 화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과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기타 불교의 공인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만장일치에 의해서 의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결정하였고, 특히 중대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왕경 사위의 동쪽의 청송산, 남쪽의 오지산, 서쪽의 피전, 북쪽의 소금강산 등 이른바 영지를 택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합의제도의 존재는 당시의 정치를 귀족연합적인 성격을 지니게 하였다. 특히, 이 귀족회의의 주재자로서의 상대등은 진골 중에서도 이척찬과 같은 높은 관등의 인물이 임명되어 귀족세력과 왕권 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졌다.
4. 골품 제도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골품제도이다. 삼국은 모두 성읍국가와 연맹왕국 단계를 거쳐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정복, 병합된 성읍국가의 지배층은 수도로 옮겨가, 중앙의 지배체제 속에 편입되었고, 중심 세력이 된 것은 수도에 사는 왕경인, 거기서도 신분제에 의해 특권이 부여된 귀족들, 특히 왕족과 왕비족의 주도 하에 소수의 가문이 지배세력을 형성했다. 이는 신라가 고대국가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제도로 귀족 상호간의 위계질서 확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골품은 성골과 진골이라는 두 개의 골과 육두품에서 일두품의 여섯 개의 두품을 포함하여 8개의 신분으로 초기의 골품제는 형성되었다.
성골은 김씨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하여 소멸하였다.
참고 자료
이인철, {신라정치제도사연구}, 일조각, 서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