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대가야’ 라는 명칭은 『삼국유사』가락국기에서는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삼국사기』지리지에서는 고령지방에 존재한 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나온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니혼쇼키 日本書記』에는 가라(加羅)라 나오기도 하며, 구체적으로 반파국(伴跛國)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대가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지리지에 시조 이진아고왕(伊珍阿鼓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지속되었다는 것과 『동국여지승람』고령현조에 시조탄생설화가 나오는 정도이다.대가야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사적 79호로 지정되어 있는 지산동 고분군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지산동 주산(主山)의 남쪽 기슭에 있다. 특히 고령 일대의 고분군 중 무덤의 입지나 규모 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 최고지배자들의 무덤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된다.
고령 지역에서의 조사 성과는 지산동 고분군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얻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지산동 고분군 묘제의 연구와 이곳에서 발굴된 토기, 장신구, 철제 농기구 및 무기 등의 유물 관련 연구는, 국가 존속 당시 독자적인 사서를 남기지 않은 대가야의 문화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대가야의 도읍지(都邑地) 고령에서 찾아낸 대가야 연구의 보고(寶庫) 지산동 고분군을 통해, 그들의 찬란했던 문화와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목차
1. 들어가며 -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문화를 배워야 할 필요성 등에 대해 서술2. 지산동 고분군의 위치와 발굴
가) 위치
나) 발굴된 고분
3. 대가야의 생활과 문화
가) 철제무기
나) 농기구
다) 토기류
라) 장신구
4. 대가야의 사후세계와 묘제
가) 묘의 형태
나) 장례 의식
5. 나가며
본문내용
지산동 고분군의 위치와 발굴가) 위치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산 8번지에 있으며 고령읍 서쪽에서 병풍처럼 고령읍을 둘러싸듯 위치한 주산(표교 311m)의 남동쪽 능선상에 대가야 시대에 축조된 200여기의 크고 작은 대고분군을 이루고 있다. 윗부분에는 지름이 20m가 넘는 대형고분으로 형성되어 있고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고분의 규모가 작아지는 특징이 있다. 지형적으로는 경북의 최남서단에 위치하여 대구시와 접하고, 88고속도로를 비롯한 4통5달하는 도로망을 갖추었고, 가야산과 낙동강 사이에 환경이 쾌적하고 토질 이 비옥하여 전원 도시, 근교농업, 중소규모의 공업지로 투자가치가 충분한 매력 있어 각광받는 지역이다.
나) 발굴된 고분
옛 가야인들은 항상 산등성이를 따라 무덤을 조성했다. 현재 발굴 조사된 가야 고분으로는 김해 금관가야의 대성동 고분군, 함안 아라가야의 말이산 고분군, 창녕 비사벌가야의 교동 고분군, 고령 대가야의 지산동 고분군 등이 있으며, 이중 고령 대가야의 지산동 고분군이 그 크기로 보나 출토된 유물의 정도로 보나 가장 장대하다고 할 수 있다.
지산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18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이루어졌으며, 이 후 1976년 고령군 공보실에 의해 이루어진 사적 정화작업으로 외형이 확실하고 규모가 큰 고분에 한해 일련번호를 매겨 현재 72호분까지 지정되어 있는 상태이다. 또한 1977∼78년에 걸쳐서는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 발굴단에 의해 44호분과 45호분이 발굴·조사되었고, 이어서 1978년에 다시 계명대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32∼35호분과 여기에 포함된 다수의 유구들이 조사되었다. 지산동 고분군의 중심 연대는 대략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있으며 이 시기는 대가야의 전성기에 해당된다.
3. 대가야의 생활과 문화
철은 고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철기의 유용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확대되었고 철 자원의 확보를 위한 정복활동과 철제무기에 의존한 전쟁은 더욱 치열해져 갔다.
가야 지역은 철의 산지였다. 따라서 철과 관련된 유물들을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령 인근에는 ‘야로(冶爐)’라는 철산지가 있는데, 야로는 우리말로 풀무를 지칭하는 한자어이다. 지역명 자체가 바로 철제 도구의 생산과 관련되어 있을 정도로, 대가야 문화는 야로 지역에서 생산된 질 좋은 철을 바탕으로 발달하였다. 가야의 무덤에 부장된 철기의 양과 질은 이웃한 다른 국가들의 그것에 비해 월등히 앞서는데, 이러한 점으로 보아 백제와 신라가 가야를 점령하려던 주된 이유를 반추해볼 수 있다.
참고 자료
참고 문헌『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대가야』, 김종철, 가야문화연구원, 1991 (제4호)
『시민을 위한 가야사』, 부산경남역사연구소, 집문당, 1996
『가야문화유적조사 및 정비계획』, 경상북도 가야대학교 부설 가야문화연구소, 가야문화연구소, 1998
『고분 자료로 본 대가야 연구』, 김세기, 학연문화사, 2003
『가야인의 생활과 문화』, 권주현, 혜안출판사, 2004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회사, 2004
『잃어버린 왕국 대가야』, 매일신문 특별취재팀, 창해, 2005
『철의 왕국 가야』, 국립중앙박물관 , 2006
이 자료와 함께 구매한 자료
- 지산동 고분군 5페이지
- 신라 고분에 대하여 9페이지
- [국사]대가야의 성립과 발전 14페이지
- 가야 17페이지
- 한국 지석묘와 영남지역의 지석묘문화 1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