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에 대하여 / 톨스토이의 생애 및 작품 세계
- 최초 등록일
- 2008.04.28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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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톨스토이의 생애 및 작품 세계와 사진까지 첨부 했습니다
목차
1. 톨스토이의 생애
2. 작가 톨스토이
3. 교육자 톨스토이
4. 사상가 톨스토이와 그의 작품 <부활>
본문내용
1. 톨스토이의 생애
야스나야 폴랴나 생가의 집필실에서 작업중인 L.N. 톨스토이. 1908년.(사진)
톨스토이는 1828년 8월28일 러시아 중앙부 툴리스카야 근처인 야스나야 폴랴냐에서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830년 그의 어머니 마리야가 여동생을 출산하다 얻은 산욕열이 원인이 되어 사망한데다 아홉살때인 1837년에는 아버지 니콜라이가 뇌일혈로 급사, 소년기의 톨스토이는 양친을 차례로 잃는 불행을 겪으며 친척집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19세였던 1847년, 대학 교육에 실망을 느낀 나머지 카잔 대학을 중퇴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합리적인 농장 관리와 영지 내의 농민 생활을 개선하려 했으나 그의 이상주의는 실패에 그쳤다. 이에 좌절한 톨스토이는 1851년까지 3~4년간 귀족사회의 많은 젊은 이들처럼 술과 여자, 도박등으로 향락적이고 방탕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러한 생활에 줄곧 반항하고 있었다. 다행히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는 타락한 귀족 청년의 생활을 청산하고, 1851년에 맏형 니콜라이의 권유로 군에 입대, 카프카스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였다. 카프카스의 아름다운 자연은 예술가 톨스토이에게 일종의 요람 구실을 하였다. 이무렵 톨스토이는 문학에 정열을 쏟아 소설창작을 시작하였다. 어린이의 심리를 가장 매혹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유년시대>를 1852년 당대의 대시인 네크라소프가 주관하고 있던 월간 문예지(현대인)에 발표, 네크라소프로부터 격찬을 받고 작가로서의 순탄한 출발을 하게 되었다.
1862년 톨스토이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궁전시인 베르스의 둘째딸이며 16세 연하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18)와 결혼, 자신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완전한 행복과 편안한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결혼 후 새로운 창작열에 불타오른 톨스토이는 문학에 전념하여 <일리야드>,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였고, 이어<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해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이무렵부터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 등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인생의 위기를 맞게 된다. 톨스토이의 사상적인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1882년 참회를 발표함으로서 과거 마음의 투쟁을 고백함과 동시에, 그후부터 종교적 정신적 방향으로 기울어져 갔다. 톨스토이는 복음서의 진리를 민화로 썼다. 따라서 이 후 글들은 종교적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
1882년, 모스크바의 빈민굴을 시찰한 후 사회조직의 결함에 깊이 생각이 미치자, 톨스토이의 사상적 번민은 윤리적 문제에서 사회제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또1885년에는 사유재산을 부정하여 이 문제로 부인과 충돌, 이후로 그의 일체의 저작권은 부인이 관리하였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국교에 속하지 않는 두호보르 교도와 친교가 있어 4천명에 달하는 이교도들을 미국에 이주시키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장편소설을 발표하는데, 그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톨스토이의 종교적인 마지막 참회이다. 하지만 <부활>에서 그리스 정교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는 이유로 종무원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사유재산 문제로 부부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반면 세상에서는 그를 위선자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가정불화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가출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1910년 10월28일 새벽, 막내딸과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길에 나섰다. 그러나 도중에 병을 얻어 현재 톨스토이역의 역장관사에서 11월 7일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
참고 자료
톨스토이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