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시대 인물조사 - 왕건의 그림자에 가려져야 했던 견훤
- 최초 등록일
- 2008.04.06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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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학전공수업 - 고려시대사 강의에 제출했던 과제물입니다.
견훤의 성장과 후백제 성립에서부터 왕건과의 충돌, 후백제 멸망에까지 그의
생애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왕건, 고려 위주의 역사적 관점에 대해
승자 위주의 관점이기 때문에 이를 보완해야 하며, 따라서 견훤에 대해
재조명하고자 하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어 여기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견훤의 인물조사를 수행하실 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견훤의 성장과정과 역사적 배경
Ⅲ. 후백제의 성립
Ⅳ. 궁예, 왕건과의 충돌
Ⅴ. 내부 분열과 후백제의 멸망
Ⅵ. 견훤의 정책 성향
Ⅶ. 맺음말
본문내용
견훤은 尙州(상주) 加恩縣(가은현),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성씨는 이였는데 훗날 견을 성씨로 삼았다. 아버지는 阿慈介(아자개)로 상주지역의 농민 혹은 장군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머니는 확실치 않으나 아자개가 上院婦人(상원부인)과 南院婦人(남원부인) 두 처를 두고 있으므로 이들 중 한 명으로 보인다. 형제관계는 견훤이 5남 1녀 중 장자로, 그의 동생으로 能哀(능애), 龍盖(용개), 寶盖(보개), 小盖(소개)와 누이 大主刀金(대주도금)이 있었다. 어린 아기였을 때 호랑이의 젖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장성하자 체격과 용모가 뛰어나 남들과 달랐으며 군인이 되기로 뜻을 품고 王京(왕경) 徐羅伐(서라벌, 이하 경주)로 들어갔는데 경주에 도착한 이후 서남쪽 해변의 防戍(방수)가 되어 해적을 소탕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잠을 잘 때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기다렸고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용맹함으로 인해 裨將(비장)이 되었다. 김부식, ≪三國史記≫ 권 50 열전 견훤전. 비장은 장군을 보좌하는 부장으로 오늘날의 부대장에 속한다.
서남해안은 견훤이 후백제의 기반을 잡게 되는 곳으로 신라에서 당으로 통하는 길목 중 하나였기 때문에 훗날 견훤이 펼쳤던 후백제의 외교 및 경제적 기반을 갖춘 호족들과의 관계 등은 비장 시절 해안을 지키면서 나당간의 교류를 접했던 것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견훤이 성장하고 세력 기반을 확립해 나갔던 9세기 후반 당시의 統一新羅(통일신라)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찬란한 문화와 삼국통일과 전제왕권 확립 이후 정치적으로 안정을 보이는 듯 했지만 사회 내부로 조금만 살펴보면 사치와 향락에 물든 귀족들의 방탕한 생활과 귀족들에게 착취당하는 백성들로 인해 민심이 동요하는 등 10세기 초에 가져올 혼란의 전초를 예고하고 있었다. 신라는 중대 이후로 철저한 骨品制(골품제)를 고수해왔기 때문에 능력에 의한 관직 진출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眞骨(진골)을 비롯한 귀족들의 전횡은 시간이 갈수록 극심해져 갔으며 특히 眞聖王(진성왕, 진성여왕, 재위 887-897) 때에 이르러 角干(각간) 魏弘(위홍)의 문란한 정치는 부패해 가는 신라 왕실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참고 자료
이도학, 『진훤이라 불러다오』, 1998
김부식, ≪三國史記≫ 권 50 열전 견훤전
신호철, 『견훤이 신라멸망에 끼친 영향』,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