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의 첫 발자국은 선사 시대의 동굴 벽화나 암각화, 암채화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대개 심미적인 표현보다는 다산과 풍요, 사냥 등을 기원하는 샤머니즘적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표현하고자 한 대상의 특징을 보다 실제에 근접시키려 했던 노력으로 보아 분명 소박한 미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목생활을 하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회화는 주로 바위에 석탄을 사용하여 동물을 그린 후, 흙으로 만든 색료를 채색하는 형태였다. 정착생활을 하던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그릇 및 장신구와 각종 무기 등에 기하학적 문양이 등장했다. 이후 이러한 흐름이 발전되어 이집트 문명의 회화로 이어진다.
고대 이집트 왕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벽화나 파피루스 그림들은 대상을 충분히 기억하고 이해한 상태에서 그 특징을 잡아내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시키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기법을 보면 이집트 화공들은 밑그림으로서의 드로잉 개념을 확연히 의식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부장용 도자기에서도 드로잉의 전범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드로잉이 독립된 예술 영역으로서 완전한 지위를 확보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균형과 비례라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적인 미의식은 로마시대 미술에서도 고스란히 전승된다. 역시 드로잉 개념이 분화되지 못한 채 장식적 수단으로 여겨졌다. 로마시대 회화의 대다수 작품들은 그리스 회화를 조악한 수준에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본 작업의 예비 작업으로 드로잉을 바라보는 시각은 중세에 들어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굳어지게 된다. 드로잉이 독자적인 발전을 모색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그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중세 서구 사회에서는 이집트의 장인들의 작업과 유사한 방식으로 많은 드로잉 작업이 행해졌다. 그들은 주로 기도서나 종교 관련 문헌의 삽화를 그리기위해 양피지에 그린 필사본의 형태로 수도원과 같은 종교 단체의 주관 아래 창작된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투시학적인 원근법의 업적과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의 두드러진 활동이 특징이다. “인간성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르네상스는 인간의 가치와 함께 인간의 한계를 함께 수용함으로써, 예술을 기(技)나 직(職)에서 한층 더 학문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현실적, 합리적, 세속적 경향으로서 미술품이 생활에 접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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