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민씨의 등장과 대원군과의 갈등
- 최초 등록일
- 2008.01.23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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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저희 누나가 과제로 냈다가 A+ 받은 레포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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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 론
2. 명성황후 민씨의 등장과 대원군과의 갈등
3. 민씨 즉위 후의 세계정세
4. 을미사변의 배경
1) 러일간의 대립
2) 국내적 배경
5. 을미사변의 결정적 원인 `인아거일`
6. 을미사변의 준비과정
7. 일본의 명성황후의 시해 준비의 치밀성
8. 을미사변의 진행과정
9. 대원군 행차에서의 의문점
10. 명성황후 시해 당시의 상황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
11. 을미사변 이후에 나타난 변화
1) 대내적인 변화
2) 조선을 둘러싼 대외적인 국제 정세 변화
3) 대내외적인 변화에 대한 요약
12. 결 론
본문내용
6. 을미사변의 준비과정
을미사변 이전, 삼국 간섭으로 인해 조선에의 영향력이 극도로 약해진 일본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시나리오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 내의 친러세력을 제거하여 러시아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조선 내의 친러세력을 제거하여 러시아와 조선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과 협상 중 어느 것도 일본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러시아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의 하나로서 일본은 전쟁을 일으켜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러시아와 조선을 연결짓는 고리, 명성황후의 제거였다. 한 때 일본은 갑신정변의 주도자이자 친일파인 박영효를 이용해 자신들의 정책을 수행해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박영효의 조선 내 입지가 확고해지면서 그가 일본의 지시를 거역하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박영효가 독자노선을 가기 시작하자 일본은 그의 고종 시해 음모를 폭로함으로써 그를 정권에서 축출시킨다. 박영효 카드를 버렸다는 것은 민비 시해는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당시 조선에 사는 일본 거류민들 사이에는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 등 세 나라의 간섭으로 왕비가 노골적인 친러정책을 쓰자 왕비를 죽여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흘러나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일본 대장성 주세국장 니오 코레시게가 조선 고문으로 온 시점에는 ‘조선 궁중 고문 오카모도, 법무 고문 호시 토오루, 군무 고문 구스세노 등이 은밀히 민씨 살해를 통해 조선과 일본간의 분규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비상책을 강구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왕비 시해 사건에 참가했던 타케다 노리유키의 전기에는 ‘민비의 재등장과 일본의 후퇴로 서울 거류 일본 민간 지사 등은 이 상황을 보고 이를 갈고 팔을 걷어붙이며 은밀히 건곤일척의 가슴 후련한 일을 계획하게 되었다’고 씌어있다.
참고 자료
명성황후-최후의 새벽 쓰노다 후사코 저 김은숙 편 1999 조선일보사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선전포고 없는 일본의 대러 개전 최문형 저 2001 지식산업사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한영우 저 2001 효형출판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이덕주 저 2001 에디터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관파천 기의 국제관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1998 동림사
새롭게 읽는 명성황후 이야기 유홍종 1999 현대문학
명성황후 시해사건 웨베르 보고서 이영숙 2001 한국전통문화복원사업회명성황후추모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