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성립배경과 전개, 사상
- 최초 등록일
- 2007.12.13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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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학 사상의 성립배경부터 전개과정 사상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리포트입니다.
목차
Ⅰ. 동학 성립의 배경
1. 19세기 사회상
2. 서구 침입에 대한 민족적 대응
Ⅱ. 동학의 전개
1. 민족종교로서의 위상
2. 교리의 정립
Ⅲ. 최시형의 사인여천 사상
1. 신관
2. 인간관
Ⅳ. 동학의 사상
1. 동학의 신관
2. 인내천(人乃天) 사상
3. 개벽사상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동학 성립의 배경
1. 19세기 사회상
19세기 조선사회는 최제우가 악질만세(惡疾滿世)로 표현할 정도로 정치 ․ 경제 ․ 사회 사상적으로 기본질서가 붕괴되는 혼란상이 야기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가장 문란하였던 것은 인사행정이었다. 과거제도의 경우를 보면 문벌 ․ 당쟁 ․ 매관매직에 좌우되는 등 관직의 수요와는 무관하게 무계획적으로 허다한 명목을 붙여 과거를 시행하였다. 즉 과다한 관리후보자를 선출함으로써 당쟁을 유발하였고 서북인을 차별하는 한편 관료적 양반정치를 자행하였다. 따라서 지나치게 문예에 치중하여 유학을 사장학화(詞章學化)함으로써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관직에 진출하려는 출세지향적 풍토가 만연되었다.
그러나 당시 과거제도 폐해의 더 큰 문제는 금력(金力) ․ 권력 ․ 혈연에 의하여 과거의 급락과 관리인선이 결정되고, 매관매직이 성행되는 것이었다. 매관매직은 인사 행정에까지 미쳐 공명첩(空名帖)을 무제한 발매하는 품직(品職) ․ 수령직(守令職)을 대량 품부하였으며 이러한 풍습은 철종말년에는 공공연히 자행될 정도였다.
경제적 악화의 요인으로는 토지소유 관계와 삼정문란에 따른 것이 대부분이다. 본래 조선왕조에서는 20년마다 규칙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과세의 기준이 되는 토지소유를 분명히 해왔으나, 양란이후 양전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함으로써 토지 경계가 부정확해지고, 총전결수는 증가하는데도 오히려 실결수(實結數)는 감소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수취체제의 기본형태인 전세(田稅) ․ 신역(身役) ․ 공물(貢物) 외에 여러 종류의 잡세(雜稅)가 있었다. 삼정으로 불리는 이러한 세가지 제도는 17세기 이후 점차적으로 개편된 것이나 세도정치로 문란해졌고 철종대에 이르러서는 한계점에 이르러 민란을 야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상적으로는 유교의 폐해를 들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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