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 최초 등록일
- 2007.11.06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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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성황후의 생애,
명성황후 살인사건 전말과 의문점
명성황후 사진 진위 등에 대해 여타 자료에서 찾을 수 없는
사진,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목차
Ⅰ.명성황후의 생애
1.명성황후의 출생과 생애
2. 흥선 대원군
Ⅱ.정치 권력에서의 명성황후
1.명성황후의 집권 세력
1)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
2.명성황후 와 흥선 대원군 의 갈등 구조 에 대한 입장
3.명성황후의 정치와 외교전략에 관한 견해
1)부정적 견해
2)긍정적 견해
Ⅲ. 명성 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1)긍정적 입장
2)부정적 입장
Ⅳ.명성황후의 초상에 대한 진위
1. 명성황후라 불리는 사진들
2. 왜 명성황후의 사진은 없는 것일까?
3. 명성황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Ⅴ.명성황후 시해 사건
을미 사변 ;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조선의 국모(國母)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1.명성황후 시해 사건 관련 기사들
2. 웨베르 보고서
3. 에조(英臟) 보고서
Ⅵ.글을 마치며
본문내용
Ⅰ.명성황후의 생애
1.명성황후의 출생과 생애
민자영는 1851년에 여흥 민씨 치록(閔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여흥 민씨는 제3대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제 19대 숙종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당시는 몰락한 상태였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8세 때 부모를 여의고 고향 여주를 떠나 서울 친척집에서 자랐으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전해진다.
1864년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이 되자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 이하응은 부패의 온상인 안동 김씨 일족의 세도정치를 뿌리 뽑고 이름뿐인 왕권을 강화하여 쇠락해진 봉건왕조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대원군은 외척의 세도정치를 원천 봉쇄할 계산으로 한미한 집안의 고아 소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아 소녀’라는 점 때문에 왕비에 간택된 것이다. 1867년 고종의 나이 15세, 민자영이 16세 때의 일이었다.
1868년, 왕의 총애를 받던 상궁이 완화군(完和君)을 낳으니 고종과 대원군은 손이 귀한 왕실에서 오랜만에 본 아들이라 크게 기뻐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비를 고르면서 뼈대는 있되 가문의 세력이 크지 않은 집의 딸로 며느리를 맞으려 했다. 명성황후는 여주 섬락리에서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는데, 아홉 살에 아버지가 죽고 곧이어 어머니 이씨도 죽었다. 그래서 계모 밑에서 자라나 역경의 길을 걸었다. 그러니 명성황후 민씨는 고아였고 형제 자매가 없는 외톨이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런 민씨를 며느리로 택했다. 명성황후 민씨가 궁에 들어왔을 적에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그녀는 왕비 수업을 받았는데 총명해서 한 번 가르쳐준 것은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이 무렵 고종은 서온돌날(임금이 왕비의 침실에 들어야 하는 날)을 무시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민비는 속은 꼭 덮어두고 후덕한 왕비의 인상을 굳히기에 노력했다. 중전은 21세가 되던 해에 바라던 왕자를 낳았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