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시대 영산강유역의 지배세력
- 최초 등록일
- 2007.10.15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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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 관한 리포트
목차
Ⅰ 머리말
Ⅱ 복암리 3호분의 구조와 조성시기ㆍ주인
(ⅰ) 3호분의 구조와 조성시기
(ⅱ) 무덤의 주인
Ⅲ 영산강유역의 옹관묘 세력
(ⅰ)옹관묘 세력
(ⅱ)옹관묘 세력의 병합시기
Ⅳ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에는 고깔 모양의 금동모 바깥에 나선형(螺旋形)의 관장식이 부착되어 있고 구슬 장식이 있다. 세심한 정성을 기울인 게 역력하고 전체적으로 상당히 화려하다. 당시 이관을 썼을 수장의 위세를 엿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마한 소국의 수장은 규모에 따라 ‘신지(臣智)’에서 ‘읍차(邑借)’까지의 칭호가 있었으며 연맹체의 수장은 왕이라고까지 불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한의 마지막 근거지인 영산강 유역에 연맹체를 구성한 왕이 있었고, 이 금동관의 주인은 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연맹체는 단순한 부족국가를 넘어 고대 국가 직전 단계까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시기에 아파트 고분인 복암리 3호분이 만들어진 것이다. 수장의 위세를 알리는 여러 유물 중 특히 고분의 대표격인 96식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발견되었다.
석실 안은 내부가 꽤 넓다. 이지역의 토착관인 옹관은 네 벽 모서리에 각각 1기씩, 총 4기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입구 쪽 옹관 옆에서 신발이 발견되었다. 보통 신발과는 다른 청동에 금을 입힌 금동신이다. 왕이나 그에 버금가는 세력가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이 금동신이 주목받는 이유는 또 있다. 이 금동신을 통해 고대 영산강 유역의 문화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호분에서 출토된 금속 유물들은 모두 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다. 길이27cm, 표면엔 문양이 조각돼 있고 동그란 금판인 영락(瓔珞)과 물고기 장식이 달려 있으며 바닥에는 스파이크가 있다. 상당히 세련된 세공기술로 볼 수 있다.
나주 금동신을 다른 곳과 비교해 보면 금동신이 출토된 곳은 16군데, 백제의 대표적인 금동신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다. 신라의 고분인 황남대총, 여기서 출토된 금동신 표면은 T자 문양을 엇갈려 조각했는데 역시 영락을 달았다. 이런 영락은 바닥에도 있는데 다만 스파이크가 없다. 비교 결과 나주 금동신은 백제나 신라 것과는 달랐다. 고대 영산강 유역은 뛰어난 세공술로 독창적인 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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