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빈민구제법
- 최초 등록일
- 2007.10.10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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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의 빈민구제법에 대해 7페이지에 걸쳐 썻습니당 ^^
목차
Ⅰ. 서 론
Ⅱ. 개별적인 자선의 행적
Ⅲ. 법적기초
Ⅳ. 구빈제도
Ⅴ. 구제기관
Ⅵ. 결 론
본문내용
Ⅱ. 개별적인 자선의 행적
역대왕조의 공식 역사기록에는 전통사회에 이루어졌던 개인적 자선의 행적이 간 략히 소개되어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조선 전기의 무신 최운해(崔雲海:1347~1404)는 왜구를 여러 번 무찔러 그 노획물로 기민(饑民)을 구호했다.
조선 태종 때의 승 장원심(長願心)은 한재가 심하자 흥천사 사리전에서 비를 빌어 비가 내리게 하였다. 천민 출신의 이 스님은 일부러 미친 척하고 기한자 (飢寒者)를 보면 꼭 먹을 것을 빌어 먹이고, 자기의 옷을 벗어 입혀주며, 앓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휼하며, 사람이 죽었는데 장사지낼 사람이 없으면 반드시 자기가 장사지내 주며, 도로를 만들고 교량을 건설하고, 가지 않는 곳이 없이 모두 다니며 사람을 돕는 일만 하였으므로 어린이들까지도 그 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인이며 기인(奇人)인 이지함(李之:1517~1578)은 말년에 아산현감이 되었을 때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감정기 외. 『사회복지의 역사』. 나남출판. 2002, p343
전통사회에서 곤궁한 자에게 구호의 손길을 내밀었던 개별적 자선의 기록들은 다수 확인된다. 아울러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쳐 불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보는 박애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사찰이나 서원, 향교, 정자 등을 건축 할 때 혹인 이재농민 구호를 위한 식량모집 때 유복한 개인들의 대규모 기부행위(즉, 박애적 기부)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건축물을 건립 할 때 대규모의 기부를 행한 자에게는 비석이나 목판 등에 그 이름을 기록하여 기부자를 영예롭게 하는 방식도 활용되었다.
참고 자료
- 이병도,『국사대관』,1957.
- 감정기 외. 『사회복지의 역사』. 나남출판. 2002.
- 권오구. 『사회복지발달사』. 홍익제. 2000.
- 『한국사회복지총람』, 한국사회복지협의회, 1977.
- 인경석. 『한국복지국가의 이상과 현실, 어떤 복지국가를 만들 것인가』.
나남출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