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曺埴 : 1501(연산군7)~1572(선조5))]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창념이며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그의 생애를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보면, 기초학문 학습 및 과거를 준비하던 시기인 26세 이전(한양 거주 시대), 성리학에 침잠하던 시기인 30~45세(산해정 시대), 성리학을 자기화하던 시기인 48~61세(뇌룡정 시대), 남명학을 완성한 61~72세(산천재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이 네 부분의 시기마다 그는 새로운 집을 짓고 마음을 새로이 하게 되는데, 그가 매번 지은 독서당의 이름은 그의 마음과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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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편법을 써서라도 자기만 잘살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너무 퍼져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선량하게 살아가는 시민들만 피해를 보는 것이 현 세상이다. 더구나 나라를 다스린다는 관리, 국회의원들조차 도덕성은 땅 끝까지 타락하고 자기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는 사람들이 허다하여 일반 시민들은 발 뻗고 자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 모든 문제가 우리 개개인이 수양이 되지 않아서는 아닐까? 나는 이를 바로잡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남명의 정신을 본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 도덕성이 살아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명이 추구했던 그런 구도자적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자신이 일상생활 속에서 몸으로 실천해 나가야 한다.
요즘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서 도덕성이 타락했다고, 옛날의 한국이 아니라고 개탄하지만, 이는 개탄할 일이 아니라 나부터 돌아봐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부터 먼저 남명의 정신을 본받아 자기 정화와 자기 실천을 해야 한다. 남명은 그저 학문만 갈고 닦을 것이 아니라 실천을 해야만 그것이 진정한 학문이라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이 아닌 몸으로 그 정신을 실천해 나가야만 진정으로 남명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경과 의를 실천하여 항상 도덕적 긴장을 유지해가며 남명의 정신을 많은 병폐를 떠안고 있는 이 사회에 접목시켜간다면 조금은 더 성숙된 사회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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