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기 신교육사조의 발흥(勃興)은 임오군란(壬午軍亂) ․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거치는 동안 외국의 침입이 빈번하여 국권의 침식(侵蝕)이 크게 드러나게 되자 교육개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게 된데서 그 시원(始原)을 찾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해외 유학생의 증가와 신기구를 증설하였고 뜻있는 선각자들은 재래 조선사회의 교육철학과 교육내용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비판을 가해 신세계에 적응할 새로운 교육체제의 설립과 사민평등(四民平等)에 입각한 의무교육의 필요성과 아울러 조선의 역사 ․ 지리 ․ 조선어 등의 교과를 내용으로 하는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주창하게 되었다.
`교육에 의한 국가의 근대화’, ‘근대 교육사조에 입각한 신교육의 전개’ 이것은 당시 교육 선각자들만이 아니라 정부 당국자의 요구였으며, 따라서 정부는 해외 유학생의 파견과 동문학교(同文學敎), 육영공원(育英公院) 등의 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의 일면을 보였고 또한 서양 선교계(宣敎系)학교에서도 근대교육을 실천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1894년 감오경장을 기점(起點)으로 교육전반에 대한 혁신이 일어났다. 즉 신학제의 반포와 구교육을 탈피한 근대교육이 조선사회의 새로운 교육전통으로 나타나게 되어 근대교육이 수용되었다.
또한 갑오경장에 의한 신학제의 확립은 근대학교의 설립에 박차를 가해 한국 교육의 새로운 교육전통을 이룩하게 하였다. 이러한 교육전통은 개화 이래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선교주의 학교에서 근대교육의 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선교교육의 이념이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설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근대교육의 시발점도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일제의 침략에 의하여 근대교육은 교육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반식민교육(反植民敎育)으로 개편하는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족감정과 국권회복을 이념으로 하는 민족교육도 활발히 전개되어 많은 사립교육기관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배태(胚胎)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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