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만큼 우리나라의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도 없을 것이다. 한국적 미를 가장 한국적인 화풍으로 표현 할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된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역량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찬란한 역량을 뽐내고 있었을 때이다. 건축(建築), 도자기(陶磁器), 목공예(木工藝), 금속공예(金屬工藝) 등 여타 분야를 망라하고 한국적 미의식이 분출되던 시기였다. 특히 회화사에 있어서 이 시기는 우리나라의 산천과 서민들의 생활상을 가장 잘 표현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풍속화(風俗畵)가 꽃피웠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훌륭한 문화적 역량을 뿜어 낼 수 있었던 근간은 바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에 의해서 발전된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이 그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양난(壬辰倭亂·丙子胡亂)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조선 후기 사회 속에서 일어난 격렬한 당쟁과 기타 사회적 모순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사회적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선하기 위한 시대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농업 사회에서 상업 사회로 전환 되는 시기였던 이때에는 돈 많은 중인 신분의 등장과 이에 따른 신분제도의 붕괴 현상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던 사회였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것은 조선 후기에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의 한 계통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에는 실경(實景)이라는 말 보다는 진경(眞景)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단순히 실제의 경치를 그대로 베껴 그리는 실경산수화에 비해 진경산수화는 더욱 더 넓고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진경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드러나는데, 진경이라는 것은 실경의 의미를 넘어서서 신선이 사는 깨끗한 땅, 다시 말해 선경(仙境)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이러한 진경산수화의 깊은 의미는 조선 후기에 그려진 진경산수화의 소재들이 주위에 있는 세속적 풍경이 아닌 금강산을 비롯한 명승고적이었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경산수화의 등장은 기존의 중국식 산수화풍에서 벗어나 진정한 조선식 산수화풍이 정형화 되어 정착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조선식 산수화풍의 정형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은 주지하다시피 겸재(謙齋) 정선(鄭敾)이다. 물론 겸재 정선 이전의 고려 시대와 조선 초·중기에 전해 내려오는 문헌에 의해 다수의 실경산수화가 전해져 내려옴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조선 회화사에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의 화풍이 종래의 관념화된 중국식 산수화풍에서 벗어나 조선의 산천을 우리의 정서에 맞게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예술적 전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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