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민속관]도시속의 명원 민속관
- 최초 등록일
- 2006.08.13
- 최종 저작일
- 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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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명원 민속관에 관한 대략적인 소개와 민속관의 세부사항을 기록 하였습니다.
한규설 부사, 명원 김미희의 여사의 얼이 살아 숨쉬는 명원 민속관.
차 문화의 김미희 여사.
민속관 건물의 사진과 설명.
감상을 적어 보았습니다.
목차
1.민속관 소개
2.한규설 韓圭卨 (1848-1930)
3.명원茗園 김미희金美熙 (1920-1981)
4.연혁
5. 민속관 건축
(1) 전체
(2) 대문 / 문간채
(3) 중문
(4) 사랑채
(5) 행랑채
(6) 안채
(7) 별채
(8) 광
(9) 사당
(10) 외곽
(11) 다정
(12) 초당
* 감상 *
본문내용
1.민속관 소개
명원 민속관은 국민대학교의 부속 기관으로서 한국의 생활 문화를 교육하고 체험하기 위한 장소이다. 특히 민속관에서는 전통 다례를 통한 생활 문화의 교육 · 연구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주택 건축은 구한말 한성 판윤 한규설의 유택을 성곡 김성곤 선생의 부인인 명원 김미희 여사가 소유주인 박준혁 선생으로부터 기증받아 이축한 것이다.
건축은 한국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서 60칸 규모에 격조있는 한옥의 원형이 잘 살려져 있다. 현재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7호로 문화재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공간과 활동은 한국인이 마음을 어떻게 다듬고, 행위하며, 심성을 이루는가를 체험케 한다.
2.한규설 韓圭卨 (1848-1930)
한규설은 부사 한승렬韓承烈의 아들이며, 총융사 한규직韓圭稷의 아우로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 호는 강석江石이며 별칭으로 순우舜佑라 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장교동에 살았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지냈다. 한규설은 고종 19년(1882)에는 좌포도대장을 역임하고, 형조.공조판서에 올랐으며, 고종 26년(1889)과 고종 27년, 두 차례에 걸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고종 27년 서울에 진출한 일본 상인들이 종로 일대에서 상업을 하려고 하자, 종로 상인들이 이에 항의하여 가게문을 닫고 저항하였다. 이 때 한규설은 우포도대장으로서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다. 특히 종로 상인들의 2차 시위 때 한규설은 조직적으로 종로의 조선 상인을 선동하여 일본 상인의 종로 진출을 막는다. 이후 그는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의정부찬성 등을 역임하고, 1905년에는 참정대신參政大臣으로 내각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요하자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를 하여 참정대신에서 파직 당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때는 일본이 한규설을 회유하기 위해 남작男爵의 직을 주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재야에서 지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