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6세기 금석문
- 최초 등록일
- 2006.05.30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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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6세기 신라의 금석문을 울진 봉평 신라비 중 영일 냉수리 신라비, 울주 천전리 서석
,영천 청제비, 단양 적성비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울진 봉평 신라비
2. 영일 냉수리 신라비
3. 울주 천전리 서석
4. 영천 청제비
5. 단양 적성비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일반적으로 금석문이라고 하는 것은 쇠붙이에 글씨를 새긴 금문과 돌에 명문을 기록한 석문을 칭하는 것으로, 금속기명∙마애석각문∙석경∙석조물조성기∙석고문∙석비류 등 다양한 종류가 있어왔다. 이러한 금석문은 내용 뿐 아니라 기록의 형태, 금석문에 부속된 문양 및 조각, 금석 기록물의 형상 및 용도 등을 통해 당시의 문화 및 사회상을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인 셈이다. 이런 금석문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17,8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점점 탁본이 성행하고 탁본첩이 활발하게 만들어진 시기였으며, 영정조의 문풍에 힘입어 금석문에 대한 수집과 더불어 탁본한 내용을 다른 사서와 비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개항 이후 일제시대에 이르러서는 금석학의 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금석문의 사료적 가치를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1960년대였는데, 한국 미술사학회가 조직되고, 문화재에 대한 정리와 함께 금석문의 수집과 발굴 및 정리작업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황수영의 《한국금석유문》과 이난영의 《한국금석문추보》 등이 간행되면서, 한국 역사 연구에 자극이 되었으며, 고탁본을 이용한 판독이 체계화된다. 최근에는 조동원의 연구 및 임창형, 허흥식의 연구가 진행이 되었다. 그런데 금석문에 관련된 작업은 그것을 활자화하는 것이 아니라 금석문을 통해서 역사, 문학, 어학, 서예 등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제공함과 동시에, 문헌사료가 부족한 한국고대사와 관련된 금석문의 새로운 발견은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에게 당시의 제도와 사회상을 연구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신라기의 금석문들은 신라사의 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6세기라는 격동의 시기에 신라의 각종 상황을 알수 있을 신라기의 금석문에 대해서 우리 조상들은, 그리고 지금의 관점은 어떻게 취해야할까? 지금부터 부족하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신라 중고 금석문 연구 -조동원-
「한국 금석문 연구의 현황과 과제」 -조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