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
- 최초 등록일
- 2006.05.11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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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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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전 봉 준
3. 김 개 남
4. 손 화 중
5. 세 지도자의 갈등과 행동방식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들어가며
동학농민전쟁 과정에서 일어나 싸움을 벌인 것은 서포라 했으니 서장옥이 그 대부였다. 서장옥을 정점으로 하여 고찰할 적에 3대 지도자를 흔히 떠올리는데, 바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그들이다. 이 글에서는 3대 지도자의 출신배경과 역할, 그리고 주도권을 놓고 벌인 갈등과 그들의 행동양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전 봉 준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지도자로서 1855년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바 있는 향반(鄕班)이었던 점으로 보아서 몰락양반 출신으로 보이며, 그의 아버지는 의협심이 강하여 군수의 학정에 항거, 민소(民訴)를 제기했다가 구속되어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장독(杖毒)으로 죽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아주 몰락하여 어릴 적부터 여러 곳을 유랑하는 생활을 하였고, 훈장·풍수·賣藥으로 생계를 꾸렸다. 1890년 무렵 동학에 입교했으며 1892년에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었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은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선두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을 요구하였으나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그는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천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민란이다. 전봉준은 조병갑의 악정을 시정하였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고부민란은 해산되었으나 안핵사 이용태의 야만적 진압으로 전라도 일대의 농민들과 동학 신도들이 크게 분개하자, 전봉준은 국면 전환을 꾀했다. 전봉준은 2월 29일경 금구 원평에서 약 3,000여 명의 농민군을 다시 결집하여 3월 11일경 금구 원평을 출발, 부안을 거쳐 무장으로 나아가 3월 20일 손화중부대․ 최경선부대와 합세하여 무장에서 다시 봉기했다. 이것이 제1차 농민전쟁의 시작이었다.
참고 자료
우 윤,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창작과 비평사, 1994
김호성, 『동학혁명과 김개남의 역할』, 한국정치정보학회, 1998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 연구5』역사비평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