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한국근현대사]태백산맥과 한국 근현대사의 재인식
- 최초 등록일
- 2006.04.15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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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본 자료는 연세대학교 한국 근현대사의 이해 수업 기말과제로 제출한 리포트입니다.
태백산맥을 통해 어두운 한국 근현대사 (해방, 제주 4.3사건, 여순반란사건, 빨치산 등)에 대해 작성하였습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4.3 제주항쟁
1) 항쟁의 불씨
2) 항쟁의 전개과정
3. 여순사건
1) 사건의 발발과 확산
2) 반란군 점령지역
3) 여순사건의 진압
4) 여순사건의 파장
본문내용
- 본문中 -
4.3제주 민중항쟁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서는 식민지 조선의 땅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가장 낙후하였으면 또한 가장 천대받는 고통과 서러움의 땅이었던 제주도의 특수한 지리적, 역사적 전통을 이해해야만 한다.
해방 이후 제주도의 경제상태는 여전히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예컨데 북에서 생산 공급되던 탄소가 부족하여 야간 고기잡이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고구마를 사들였던 주정공장과 제주시에 전력을 공급해 오던 발전소가 석탄부족으로 거의 정지상태에 들어갔으며, 여기에 도(道)로 승격하면서 가중되게 된 조세부담으로 더욱 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해방 직후 제주 민중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1945년 9월 15일 제주읍 인민위원회를 시발로 각 방 인민위원회, 이후 22일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그외 부녀동맹, 교육자동맹, 노동조합, 소비조합, 제주문화협회 등 각종 대중단체가 잇달아 조직되어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주 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9월 말경 미군부대의 제주섬 진주와 함께 육지에서도 별반 다를게 없는 시대적 역류의 흐름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미군의 진주와 함께 숨을 죽이고 있던 민족반역자들이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미군의 주도아래 법원, 검찰 그리고 경찰 등 각종 폭압기구를 창설하게된다.
이와 함께 1946년 1월 15일, 미군정은 그동안 도민들이 자주적으로 관리해 오던 도민의 공공재산으로서의 구일본인 재산, 즉 적산을 송두리채 강탈하여 자기들 손에 거머쥐었다.
미국인 마크 게인조차도 그의 『일본일기』에서 당시의 사태에 대해 "나는 번뇌와 부끄러움으로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탄압하는 데 있어서 단연 으뜸간다 할 수 있을 야만적인 경찰국가가 우리 국가와 함께 탄생하고 있는 것을 보아 왔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후, 친일파들의 비밀테러단인 `한라단`이 도인민위원회를 습격하는 사건을 위시로 본격적인 인민위원회와 각종 민주단체에 대한 파괴공작이 감행되었다.
미군정의 제주민중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살상, 탄압에도 불구하고 제주 민중은 대중적인 자위투쟁으로 이에 맞서나갔다.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청년단체의 야수적인 탄압에 의해 새조국 건설의 꿈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생존권마저 처참하게 유린당한 제주 민중들은 미국과 이승만의 단독선거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고 이에 미군정은 일관되게 폭력으로써 억누르고 있었다.
1948년 2월 중순, 수많은 제주민중들은 안덕면 사계의 모래벌판에서 단독선거 반대 집회를 가졌다.
바로 그때 안덕지서의 경찰대와 우익청년단체가 갑작스럽게 공격을 가해왔고, 이에 잠재되었던 분노가 폭발하면서 집회에 참석중이던 민중들은 즉각 돌맹이와 몽둥이를 가지고 그들을 포위 공격, 이윽고 도망가는 지서장을 잡아 민중재판에 부쳤다. 이 사건으로 미군정은 더욱 강압적으로 대응, 수많은 제주도민들을 `빨갱이`나 `동조자`의 이름으로 고문, 살행을 저질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