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몰리에르에 대해서...
프랑스의 극작가 배우 본명은 장 밥티스트 포클랭(Jean Baptiste Poquelin) 파리에서 태어나 당시 시민의 자제로서 최고에 가까운 교육을 받았으나 학업을 끝마칠 무렵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를 알게 되어 가업을 버리고 “성명극단”을 조직하여 연극으로 제 1보를 내디뎠다. 극단은 관객을 끌지 못하여 해산하고, 몰리에르는 동지들과 남프랑스 순회를 떠났다. 십수년간 프랑스중부와 남서부를 이동하는 동안 지방극단으로 점차 성장하였다. 그동안 극단경영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동시에 이탈리아 즉흥극의 계통을 이어받은 연기술.작극법을 체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1658년 ⌈왕제 전하의 극단⌋이란 호칭을 얻고 파리로 돌아와 루이 14세 앞에서 공연한 무대가 국왕의 마음에 들어 왕실소유 프티부르봉 극장의 사용이 허락되었다. 1664년 베르사유궁에서 향연이 있었을 때 위선자를 풍자한 《타르튀프》를 상연하여 교회 신자들의 노여움을 사서 시중에서의 공연은 중지당하였다. 그래서 급히 《동 쥐앙(돈 후안)》(1665)을 써서 공연하였으나 이것도 대담한 희극이었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뜻에 따라 15회 공연 후에 자발적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이 14세는 그 보상으로 그를 ‘국왕 전속극단’으로 하여 1만 5,000리브르의 연금을 주었다. 1666년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 혐오자 Le Misanthrope》를 발표하였으나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주르댕은 비록 신분은 서민이지만 귀족 못지않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 부유함에 걸맞는 존경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귀족으로 신분 상승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귀족들과 비슷한 위치에 서서 그들의 생활과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모방하려는 강한 열망이 나타나 있다. 주르댕은 평민이 돈을 벌어 양반의 이름을 사고 졸부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염상섭의 “삼대”라는 작품에 나오는 덕기의 조부와 성격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 두 인물은 공통적으로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좀 더 높은 신분에 오르고자 하는 다른 형태의 권력욕을 가지고 있다.
자료의 정보 및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해피캠퍼스는 보증하지 않으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자료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 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의 저작권침해 신고센터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피캠퍼스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아래의 4가지 자료환불 조건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오류
중복자료
저작권 없음
설명과 실제 내용 불일치
파일의 다운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일형식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