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역사]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최초 등록일
- 2005.12.18
- 최종 저작일
- 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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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가 흔히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대해서 옹호 비판 두 입장에 대해서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묘청의 평가가 어떠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도 포함이 되있습니다.
교양시간에 발표자료로 했는데,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 무리없을 것입니다.
목차
1. 그 당시 국제 정세
2. 그 당시 국내 상황
3.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경과
4. 시대적 변화에 따른 묘청의 평가
5. 묘청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5 묘청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
6. 결론
7. 참고문헌
본문내용
3.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경과
이렇듯 국내적으로는 정치세력간의 다툼으로 민심이 흉흉해 지는 가운데 부모의 나라로 고려를 섬기던 여진족은 금제국을 건립한 지 불과 2년 후인 1117년(예종 12) 3월, 금 태조 아골타는 “형인 대여진 금국황제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월을 보낸다“라는 서한을 보낸 바 있으며, 1125년(인종3), 요를 멸망시키고 송의 수도 변경을 압박하던 금은 고려에게 ‘형제관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군신관계’로 사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금의 태도 변화에 고려는 분개하였으나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을 위협하는 현실적인 힘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묘청 등 서경일파는 서경천도와 더불어 칭제건원, 금국정벌 등을 주장하였다. 묘청은 인종에게 개경의 지덕이 쇠진하였기 때문에 궁궐이 불타 없어지고 서경은 왕기가 있어 이곳을 수도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 가히 천하를 합병할 수 있고 금나라가 방물을 바치고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모두 조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인종은 서경에 자주 거둥하면서 서경의 명당자리인 임원역에 대화궁을 짓게하는 등 서경천도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는 서경천도를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이 바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인데, 그들은 서경으로 천도하게 되면 자신들의 지지기반이 없어지게 되므로 극심히 반대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인종의 서경 거둥 도중 폭풍우를 만나 사람과 말이 죽고, 대화궁 근처에 벼락이 떨어지는 등 불상사가 잇따라 겹치면서 인종은 마침내 서경천도 계획을 중단하고 말았다. 천도계획이 실패하자 묘청은 1135년 정월에 조광, 유참 등과 함께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중앙정부는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임명하고 진압하도록 했다. 김부식은 개경에 있는 묘청일파를 숙청한 이후 진압에 나섰는데, 이때 많은 성들이 중앙정부군에 호응하여 전세가 정부군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토벌군의 기세에 겁을 먹은 조광은 묘청, 유담의 목을 베고 항복할 뜻을 알렸다. 개경에
참고 자료
「묘청난의 원인」 고려대학 출판부
「고려사의 전이」 삼영사
「고려시대 사람들 이야기」 신서원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 출판사
「고려시대의 정치변동과 대외정책」 경인문화사
「두산 대백과 사전」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3)묘청은 `정감록`의 숨은 뿌리였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박영규 지음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