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세사]조선 후기의 신분제 변화와 삼정의 문란
- 최초 등록일
- 2005.12.06
- 최종 저작일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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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중세사
조선 후기의 신분제 변화
삼정의 문란
목차
- 조선후기 신분제도의 분화
- 세도 정치의 등장과 삼정의 문란
본문내용
세도 정치의 등장과 삼정의 문란
조선후기 붕당정치가 사라지고 이른바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하에서 극심한 부패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국가의 조세의 근간이 된 전정․군정․환곡의 문란 즉 삼정의 문란으로 이는 절대적으로 양인의 부담의 증가로 조선 후기 사회의 동요를 일으킨 결정적 요인이 된다.
전정은 토지를 대상으로 한 세 행정으로서 올바른 전정운영을 위해서는 토지의 결수 파악과 세의 공정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으나 숙종의 양전사업이후 전국 적인 양전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양란이후 과세지의 감소는 피폐한 농촌의 사정을 생각지 아니하고 이전의 양전 자료를 바탕으로 한 수취문제는 양인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정부의 세수수입 감소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정부는 부족한 재정기반마련을 목적으로 전결세(田結稅) 조선 후기 토지에 부과되던 모든 조세를 일괄하여 수취하는 일종의 전결세 수취행정으로
17세기 이후 대동법촵균역법의 실시 등 일련의 세제개혁을 통하여 각종 조세가 토지로 집중되고,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된 전기의 조용조 체제가 무너지면서 토지에 세를 부과하여 수취하는 일련의 제도 및 그와 관련한 행정을 전정이라 일컬는다 조선 후기 전정은 탐관오리에 의해 악용되어 농민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농민봉기의 원인이 된다. 그리하여 이 시기 군정과 환곡의 문란 현상과 함께 1862년 농민봉기의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된다.
의 수납 방법을 시행하였으나 오히려 지방관아와 양반 향리에 의한 농민 수탈 강화의 결과로 나타났다. 즉 남징과 과징의 일반화로 법제상 전세 4두(인조 13년 영정법)와 대동미 12두 삼수미 1두2승과 결작세 2두와 부과세로 총 22두~24두였지만 실상은 40여종의 잡세 수취와 토지세의 수취는 미 60~80두였으며 19C말 증가된 세목으로 100여종에 이르는 전정을 부담하여 농민의 삶은 피폐해져 나갔다.
군정의 문란은 정남 1인 군포 1필을 납부하던 것이 군액의 납설되면서 부담이 증가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송찬섭,「조선 후기 환곡제 개혁 연구」(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변태섭,「한국사 통론」(삼영사, 1996)
한영우,「다시 찾는 우리역사」(경세원, 2001)
최승희,「조선후기 사회신분사연구」(지식산업사, 2003)
오영교,「조선후기 향촌지배정책 연구」(혜안,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