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최근세사]제 1차세계대전의 원인 - 학자들의 해석사
- 최초 등록일
- 2005.12.01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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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학자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제 1차세계대전의 원인을 살펴 보았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는 보통 일반서적 보다는 논문에 나와 있어서 논문을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학자들의 견해
1. 피셔 측 주장
2. 쩨힐린과 에르트만의 주장
3. 사회주의적 해석
4. 구조기능주의적 해석
Ⅲ. 마치며
본문내용
피셔는 1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책임은 정치지도자인 베트만 홀벡(Bethmann- Hollweg) 수상에게 있다고 하였다. 그는 1914년 7월위기를 1912~13년의 발칸위기와 비교하면서 왜 베트만 홀벡이 1912~·13과 마찬가지로 1914년 7월에 오스트리아의 강경한 발칸 정책에 제동을 걸지 않았나는 것이다. 피셔는 베트만 홀벡이 1913년과는 달리 1914년에는 전쟁을 원했다고 하고있다. 피셔의 제자 가이스(Geiss)는 1914년 초 “잔더스(Sander)위기”로 오스만 터어키에서 독일과 러시아의 대립이 심해졌다고 하고 있다. 피셔의 주장에 동조하는 영국의 역사학자 뢸(Röhl)은 1912년 12월 8일의 “전쟁회의(Kriegsrat)"와 1914년 7월 위기를 연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뢸의 연구성과에 힘입은 피셔 측은 1913년에는 아직 독일 군사력이, 특히 해군력이 잠수함 기지와 운하 확장공사 문제 등의 전쟁에 대해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912년 12월의 전쟁회의 이후 1년 반이 지난 1914년 7월에 독일은 해군이 전쟁에 대해서 준비 되어있었고, 러시아와의 관계악화로 러시아와 전쟁을 원했었다는 것이다.
피셔는 7월위기에서 독일 정책결정자들이 추진했던 것은 발칸의 국부적인 위기를 의도적으로 유럽 위기로 확대시켰다고 하고 있다. 베트만 홀벡을 비롯한 당시의 독일 정책결정자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프랑스, 러시아와의 전쟁을 예상하였다. 오늘날 피셔의 비판가들 역시 제국지도부가 당시에 적극적․의도적으로 대전의 모험을 감행할 채비가 되어있었고, 그리고 그것은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항하는 대륙전쟁만이 아니라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영국을 향한 세계대전이었다고 하고 있다. 피셔의 주장에 따르면, 제국지도부는 차라리 오스트리아-세르비아간의 전쟁을 국부적으로 진행시키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외교적인 압력을 통해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의 협상을 깨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계책 1호) 그리고 이것이 성공치 못할 경우에 한해서 대전의 모험을 감행할 생각이었다.(계책 2호). 60년대 중반에 피셔는 리츨러의 일기장을 참조하기를 권하면서 계책 2호를 우선적으로 여겼다.
참고 자료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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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홍, 《서양사 개론》, 삼영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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