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성덕태자
- 최초 등록일
- 2005.11.14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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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론은 왜 성덕태자를 조사하게 되었는지 동기를 쓰고 직접 설명은 본론에서 시작했습니다.
백제와 연관된 그의 출생과, 정치적 업적, 그리고 불교 숭상을 바탕으로 일으킨 아스카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썼습니다.
성덕태자가 세운 절이나 그곳에 있는 유물들은 책에 나와있는 자료가 별로 없어서 일본어 사이트를 직접 번역해서 썼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작성한 자료이니 많이 참고하시고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래요 ^^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성덕태자의 출생일화
2. 성덕태자와 백제의 혈연관계
3. 숭불파, 성덕태자
4. 성덕태자의 정치
5. 불교숭상-그가 건립한 절과 불상
6. 신불습합사상(神佛習合思想)
Ⅲ. 결론
본문내용
聖德태자는 6세기 후반에 用明천황의 제2황자로 태어났다. 用明천황의 모후는 蘇我馬子(소가노 우마코)의 친누나였고, 聖德태자의 어머니는 蘇我馬子의 생질녀였다. 이러한 중첩혼으로 인해 聖德태자는 蘇我(소가)씨 집안과 혈연적으로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야마토 조정에서 蘇我씨는 재정권을 담당하며 大臣의 직위를 세습하여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蘇我馬子의 고조부인 蘇我滿智(소가노 마치)는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인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백제인 이였을 때의 이름은 ‘목리만치’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雄略천황(456-479)은 한반도에서 건너 간 관리들을 중용한 대왕이었다고 한다. 목리만치도 이 때 외교나 재정 면에서 솜씨를 발휘하여 중용된 것으로 보이고 있다. 목리만치가 나라 땅에서 새 터전을 잡은 장소는
-성덕태자와 백제의 혈연관계 中
하지만 그는 불교를 탄압하지도 신도를 탄압하지도 않고 두 종교를 모두 취하는 형식을 갖췄다. 物部와의 전쟁이후 蘇我씨가 권세를 잡고 불교 중흥정책을 펼쳤지만, 신도파, 즉 가야출신들의 일본국민이 아직도 상당수에 달하기 때문에 성덕태자는 `신불습합`을 내세웠다. 불교를 믿는 백제계 국민들과 신도를 믿는 가야계 국민들의 화합.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당시 일본의 정국은 안정될 수 없었다. 신도와 불교는 엄연히 별개의 종교이다. 부처와 조상신은 합해질래야 합해질 수 없는 서질의 것이다. 그러나 성덕태자는 그것을 합하려고 했다. 이것은 놀라운 정치적 책략이다. 여전히 남아있는 신도세력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적 일대 결단인 것이다. 모두를 어우르고 정치적 안정을 취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불교와 신도, 양자를 인정해야 했다. 유교적 사상 또한 깊었던 聖德태자는 유교와 불교와 신도를 합하여 신불유습합사상(神佛儒習合思想)을 만들어 냈다. 이는 모든 종교를 어울러서 취하는 것으로, 일본에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는 좋은 점만 취한다는 良いとこ取り(이이토코토리)정신으로 발전하고, 바로 현재의 일본을 만들어 낸 중요한 문화이기도 하다.
참고 자료
1. 홍윤기,「일본문화사」, 서문당, 1999년
2. 河合敦,「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중앙M&B, 2000년
3. 堺屋太一, 「일본을 이끌어 온 12인물」, 자유포럼, 1997년
4. 김희영, 「이야기 일본사」, 청아출판사, 1993년
5. http://www.tabian.com/tiikibetu/kinki/nara/horyuji(法隆寺)
6. http://www.shitennoji.or.jp(四天王寺)
7. http://www.horyuji.or.jp/hokiji(法起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