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 겨울, 동경 W대학 문과에 재학하며 학기말 고사를 준비하던 나는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다. 늘 앓던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으므로, 단골 카페로 정자(靜子,시즈꼬)를 찾았다. 나는 그녀를 앉혀 놓고 술을 마시고 목도리를 선물한다. 나는 아내가 죽어 간다는 소식을 받고도 이렇단 충격도 없었다. 그럭저럭 시간이 되어 하숙집을 들러 정거장에 나갔더니 시즈꼬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 속에서 그녀에게 선사 받은 보자기를 끌러 보니, 술병과 먹을 것에 편지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영리한 계집애이므로 동정할 만하며, 카페의 접대부로서는 아깝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으나, 한 번도 그 이상 어떻게 해 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정자는 나의 이러한 생각에 불만을 토로했었다.
시모노세키까지 별일 없이 왔다. 시모노세키에 내리자 그저 조선 사람이란 트집으로 귀찮게 구는 형사들에게 크게 시달렸다. 나는 여기서부터 조선 사람이란 것을 유별나게 느끼게 되었다. 연락선에 탔을 때 사방에서, 특히 일본인들에게 식인종(食人種)이라고 조롱하는 소리와 경멸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고, 배 떠나기 전에 심문에서 협박까지 받게 되었다.
부산에 내려서도 또 형사에게 시달렸다. 나는 기진맥진되었다. 이윽고 거리로 나왔을 때 나는 조선 사람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그런 집은 없었다. 기차가 김천 역에 도착했을 때, 서울 집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김천형이 금테 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역에 나와 있었다. 나는 역에 내렸다. 나는 국민학교의 훈도인 형의 덕택으로 여기서는 형사의 수작을 받지 않게 되었다. 형 댁에는 새 형수가 한 사람 와 있었다. 형수가 아들을 못 낳아서 새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어떻든 한번은 내 의견을 꺼내 놓고 마는 나는 기어코 못마땅한 어조로 한바탕 불만을 터뜨렸다. 정말 딱한 일이다. 이윽고 형은 산소 걱정을 시작했다. 총독부 법에 의해서 지금부터 무덤은 공동 묘지밖에 쓸 수 없다고 해서이다. 얼마나 할 일이 없기에 산 사람 묻을 구멍부터 염려를 하고 있나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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