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후기 낭만주의
- 최초 등록일
- 2005.10.29
- 최종 저작일
- 2004.09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후기 낭만주의
목차
1.후기 낭만주의
2.로씨니 - 세빌리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
3.후기 낭만파의 경향
4.바그너( R.Wagner, 1813-1883) 독일 <악극의 창시자>
본문내용
아버지 프리드리히는 연극애호가로서 경찰서 서기로 근무하였으며 3명의 형, 5명의 누이가 있는 아홉째인 막내였다. 아버지 프리드리히는 바그너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죽어서,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배우이면서 시인․화가인 L. 가이어의 보호를 받았으며 또 바그너 자신이 한때 가이어라는 성(姓)을 썼기 때문에 가이어가 실제 부친이라는 설도 있다. 가이어가 드레스덴 궁정극장의 배우 겸 대본작가였으므로 바그너는 4세 때 무대에 서고, 8세 때 음악에 대해 천재적 재주를 나타내었으며 13세 되는 해에는 비극 《로이바르트》를 쓰기 시작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우선 문학과 연극에 열중하였다. C. 베버의 오페라 《마탄(魔彈)의 사수》를 좋아했던 바그너는, L. 베토벤의 작품을 듣고 음악가가 될 것을 결심하였고, 18세에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함과 동시에 C.T. 바인리히에게 작곡이론을 배웠다. 19세 때에는 교향곡 제 1 번을 작곡, 초연(初演)하는 한편, 미완성 오페라 《혼례》에 착수하였다. 20세 때인 1833년부터 39년 사이의 시기는, 편력시절이라고 말할 정도로 각지를 찾아다니며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길을 개척하였다. 우선 형이 가수로 있는 뷔르츠부르크시립오페라극장의 합창지휘자로 취임하여 오페라를 실습하면서 《요정(妖精)》의 창작에 몰두하였다. 34년에는 마크데부르크를 본거지로 한 베토만오페라단의 지휘자가 되고, 여배우 미나 플레너와 사랑에 빠진다. 36년 오페라 《연애금제(戀愛禁制)》를 완성․초연하고, 미나와 결혼, 37년 쾨니히스베르크극장 지휘자, 리가극장 지휘자 등으로 편력을 계속하였다. 대도시에서 성공을 꿈꾸던 바그너는 39~42년 파리에 체재하였다. G. 마이어베어의 추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작품 상연의 희망이 모두 어긋나 바그너부부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진다. 그러나 불굴의 바그너는 《파우스트 서곡》, 오페라 《리엔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차례로 완성하였다. 또 생활을 위해서 문필활동을 하였던 바그너는 소설 《베토벤 순례(1840)》와 《파리에서의 최후(1841)》를 비롯하여 많은 평론을 썼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