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1892~1950)의 아명(雅名)은 보경이요 광수는 관명(冠名)인 듯하다. 호는 춘원(春園), 장백산인(長白山人) 등이 있으나 주로 춘원으로 알려져 있다. 춘원은 1892년생으로 이 해는 청일전쟁이 나기 3년 전이다. 춘원은 개화기 시대를 문학적으로 완성하면서 다음 세대에 새로운 형태의 문학적 도전을 가능케 해 준 이중의 역할을 맡고 있다. 1910년대에 이르는 개화과정을 투철하게 지켜볼 수 있는 여건 밑에서 자라났으며 나라의 상실이 갖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그런 세대에 속한다. 11세에 고아가 된 춘원은 19세에 일본 동경 명치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후, 고향 정주로 돌아와 오산중학교 교원이 된다. 1차 관비유학생으로 와세다 대학을 다녔고 이 시기부터 작가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린 벗에게>, <무정>, <방황> 등이 이 때에 씌어진 것이다. 을미년에 동경학생들이 일으킨 2월 8일 독립운동사상을 모의하여 그 선언서를 기초하였고 상해로 망명했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진정한 자기애는 이기적인 사랑과는 구별되며, 진정한 자기애로부터 타인에도 온전히 실행’될 수 있다. 그는 선각자로서의 사명감 이전에 진정한 자기애를 가졌어야 하고 그로부터 민족을 향한 올바른 방향정립과 계몽사상기 나올 수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가지 친일행위와 후에 발표된 통속소설을 합한다고 해도 그의 작품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 문학사에서 깊은 자국을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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