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오원 장승업의 회화사적 의미
- 최초 등록일
- 2005.07.23
- 최종 저작일
- 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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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머리말
제2장 장승업의 삶
1절 - 출생(出生)과 생애(生涯)
2절 - 여러 인물과의 관계
제3장 영모도 대련(翎毛圖 對聯)
1절 - 조선말기(朝鮮末期)의 시대상황(時代狀況)
2절 - 오원의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
3절 - 영모도 대련(翎毛圖 對聯)
4절 - 「호취도(豪鷲圖)」감상
제4장 장승업의 회화사적 의미
1절 - 장승업의 전과 후
2절 - 장승업의 회화사적 의미
제5장 맺음말
◆참고문헌◆
장지연의 『일사유사』의 『장승업조』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의『장승업』
본문내용
장승업(張承業)은 조선 초기의 현동자(玄同子) 안견(安堅), 조선 후기의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또는 조선 후기의 겸재(謙齋) 정선(鄭敾)을 추가하여 4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 대가들 중에서 가장 늦은 19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다. 따라서 3대 화가들 중 우리들과 시대적으로 가장 가깝기도 한 인물이다. 조선시대 말기(末期)의 회화사(繪畵史)에 큰 발자취를 남긴 오원(吾園) 장승업은 불과 100여 년 전의 인물이지만 그의 생애나 회화 수업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부분이 미지(未知)의 인물로 남아 있다. 이처럼 장승업에 대한 기록이 드문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다. 즉 당시는 500년을 이어온 문화대국(文化大國) 조선왕조가 쇠망해 가는 시기였고, 또 이어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문화예술 방면에서 자기성찰과 자세한 기록․보존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상당수의 그림들로 그의 회화세계를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는 글공부를 전혀 못한 무식한 화가여서 관서(款署)조차 자신이 쓴 것이 아니며 누군가가 써 준 것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해서 남게 된 화제(畵題)나 그림을 증정 받았던 인물들의 이름을 알려주는 발문(跋文)을 통하여 그의 생활 주변이 다소나마 밝혀지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글에서는 장승업에 대한 기록과 그의 작품세계, 특히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인 「영모도 대련(翎毛圖 對聯)」 중「호취도(豪鷲圖)」를 중심으로 검토하여 한국미술사에서 장승업의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조선말기의 시대상황과 19세기 후반중국적 경향 그리고 장승업의 제자이자 동시대인이었던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조석진(趙錫晉, 1853~1920)
에 대해 살펴보고, 이후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겠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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