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학살 - 제주4.3사건
- 최초 등록일
- 2005.07.10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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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제주 4.3의 배경
1) 제주도의 상황
2) 3.1 시위와 미군정의 경찰의 총격
3) 제주도민의 항의 총파업과 미군정의 탄압
4) 미군정의 무력진압
2. 진행과정
① 1948년 4월 3일
② 4.28 평화협상과 5.1 오라리 방화사건
③ 5.10선거 거부 투쟁
④ 박진경의 초토화작전
⑤ 학살 - '삼광(三光)', '삼진 (三盡)‘ 작전
⑥ 지속되는 대학살과 항쟁의 종식
⑦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
4. 끝나지 않은 4.3
본문내용
1. 제주 4.3의 배경
1) 제주도의 상황
당시 제주도는 군정당국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던 분위기였다. 6만 명에 이르는 귀환 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300여명의 희생,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악재가 겹쳐있었으며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군정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터진 ‘3.1절 발포사건’은 제주도민들을 흥분시켰다.
2) 3.1 시위와 미군정의 경찰의 총격
1947년 3월 1일, 제주도 내의 제주읍 내에서 약 10만 명이 참가하여 대규모의 3. 1독립운동 기념대회가 개최되었다. 오후 3시경, 약 3만 명의 군중이 해산하는 과정에서 한 기마 경관의 말굽에 어린 소년이 채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마 경관이 아무런 조치없이 유유히 경찰서 쪽으로 나아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투석을 시작했고 이어 총소리가 터졌다. 이 사건은 6명의 사망자와 8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3) 제주도민의 항의 총파업과 미군정의 탄압
사건 발생 열흘 뒤인 3월 10일부터 제주도민들은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제주도 전역에 걸쳐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이 파업에는 도청을 비롯한 도내 165개 관공서와 국영기업 단체들이 참여했으며 이 결과 도전체의 질서가 완전히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할 정도로, 대중적인 호소력과 참여도를 보여주는 전 도민적 차원의 반미항쟁이었다.
4) 미군정의 무력진압
제주 도민의 저항에 직면한 미군정은 3월 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3월 14일 조병옥을 위시하여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반공청년단체를 파견하여 파업을 분쇄하였고, 곧이어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 간부와 직장별 주동자 검거에 나서 지속적으로 약 2,500명을 무더기로 검거하고 고문한 다음 이 중 25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로부터 4.3 발발 직전까지 1년간 약 2500명이 구금되었다.
참고 자료
강요배,『동백꽃 지다 - 강요배의 4.3 역사화』, 학고재, 1998
제주 4.3 연구소, "www.jeju43.org"
제주 4.3 웹사이트, “www.cheju43.org”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www.genocid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