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론]남북국시대론의 비판적 검토
- 최초 등록일
- 2004.11.06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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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또한 ‘고려국왕’ 이라는 자칭에 관해서는 이미 石井正敏 의 치밀한 사료고증이 있듯이, 石井政敏, 1975「日渤交涉における渤海高句麗繼承意識について」『中央大學大學院硏究年報』4
발해를 일찍이 말을 낮추어 조공해온 적이 있는 노태돈,「對渤海日本國書에서 云謂한 『高麗舊記』에 대하여」는 일본측에 전해지는 고구려의 대일외교의 이러한 자세를 고구려멸망 후에 신라 영역내의 金馬 에 安 된 高句麗遺民政權에 의한 대일외교의 소산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로 간주하려는 일본측의 대응과 정책적 의도를 짐작하고, 외교교섭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취해진 일종의 겉치렛말 같은 성격을 띤 방책이었던 점은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세 번째 발해의 견일사에 주어진 答書〔『속일본기』권19, 天平勝寶 5년 6월 정축조〕에서 고구려의 옛날의 예를 따라서 끝까지 군신관계의 國書形式을 받아들이고자 한 말을 비롯해, 발해사신에 대한 일본측의 일련의 시대착오적인 대응을 본다면, 충분히 설득력있는 견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石井의 실증을 무시하고 쓰여져 있는 字句를 맥락과는 관계없이 추축하여 그것을 문자대로 하나의 뜻으로 밖에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 자세에는 강한 의문을 느낀다. 노태돈은 石井의 주장을 비판하며, 일본측의 시대착오적인 요구에 발해측이 응했다고는 인정되지 않는 것을 논하고, 뒤의(771년) 양국간의 국서를 둘러싼 분쟁에서도 발해가 자국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을 그 傍證으로 삼고 있다〔「대발해일본국서에서 운위한 『고려구기』에 대하여」, p.624~5〕. 그러나 발해의 일본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는, 타협적인 외교를 강요당한 바로 그 초기에 어떠한 국제환경 속에서 맺어졌는지가 중요한 논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ㆍ국제적 조건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또한 이 점에 대해서는 아래의 여러 논문을 참조. 石井正敏, 「日本通交初期における渤海の情熱について-渤海武ㆍ文兩王交替期を中心として」(『法政史學』25, 1973년)과 「初期日渤交涉における一問題-新羅征計畫中止との關連をめぐつて」(『史學論集 對外關係と政治文化』1, 吉川弘文館, 1974년) ; 酒寄雅志, 「入世紀における日本の外交と東アアのジ情熱-渤海との關係を中心として」(『國史學』103, 1977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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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발해사를 한국사로 설정하는 입장에서의 발해사 연구를 구체적으로 비판ㆍ검증해 가고자 한다. 발해사를 한국사 체계에 넣는 논거는 박시형의 ‘발해의 혈통 자체와 문화는 오늘날의 조선민족의 혈통과 문화전통의 중요한 구성분자가 되고 있다 라는 말이 상징하고 있듯이, 결국 민족ㆍ종족문제에 수렴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다. 그 경우에 발해의 영역에 그 前史로서 있던 고구려사는 한국사에 없어서는 안될 일부이다. 그리고 고구려인은 한국 민족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발해를 한국사에 위치 지우는 작업은 우선 발해의 민족ㆍ종족상의 고구려 계승관계를 논증하는 것이 그 중심적 과제로 되는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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