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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사의 전환점 - 영화 <신해혁명>과 <마지막 황제>의 감상을 중심으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신해혁명>
(1) 줄거리 – 전개 방향과 결과를 중심으로
(2) 평가
2. <마지막 황제>
(1) 줄거리 – 구조 속 개인의 모습을 중심으로
(2) 평가
Ⅲ. 결론
Ⅳ.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장리 감독의 <신해혁명>(2011)과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1987)는 중국 후기 근대사를 폭넓게 다루고 있는 영화들이다. 두 영화 모두 신해혁명을 중심으로 청조 몰락의 전후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이 사건들은 현재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며 관련 논의도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먼저 영화 속의 시대 배경을 살펴보고 중국 근대사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해혁명의 두 영화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에 대한 감상을 서술할 것이다.
Ⅱ. 본론
1. <신해혁명>
(1) 줄거리
영화 <신해혁명>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라 사실상 신해혁명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나 다름없다. 다만 <신해혁명>은 1911년 4월 27일에 광저우 총독부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장면부터 시작되는데 그 이전의 배경부터 짧게 설명하고자 한다. 신해혁명 이전의 청나라 조정은 아편전쟁 이후로 서구 열강에 이권을 빼앗기고 청조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지 못하는 상태였다. 재정이 악화되며 많은 세금을 걷고 있었고 민중은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청조는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관제를 개혁하고, 신군을 창설해 군벌의 싹을 틔웠다. 청조는 정치 개혁이나 입헌 준비에 소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청조가 신정을 추진하면서 민중의 세금 부담이 증가하며 반발을 샀기 때문에 혁명 사조는 자연히 확산되게 된다. 또한 현대적 개념의 학당들이 설립된 것도 혁명 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수 있는 배경이었다. 1905년에는 민족, 민생, 민권의 삼민주의를 중심으로 한 중국 동맹회가 창설되며 신해혁명의 발판이 되었다.
청말기에는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가 등장하면서 지방 정치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청조가 입헌을 향한 요구를 수락해 행정부의 성격을 갖는 자정원과 의회의 성격을 갖는 자문기관 자의국을 설치한다고 밝혔는데, 이로 인해 성 단위로 존재하던 지방의 엘리트들이 입헌제 수립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11년에는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려고 했던 내각 관제가 제정되지만 13명 중 황족 5명을 포함한 8명이 만주인으로 사실상 전제군주제와 다를 것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고 혁명의 필요성은 점점 커져 갔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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