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학의 충실한 소개자 하야시 라잔
- 최초 등록일
- 2024.05.09
- 최종 저작일
- 20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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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태홍은 성균관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의 역사학과 석사과정을 거쳐,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한국사상사학과에서 문학석사를 취득, 동경대학교 동아시아사상문화학과학과에서 문학석사와 박사를 취득하였다. 저서로는『조선의 선비가 일본 사무라이를 만날 때』(2019), 『동아시아의 자국인식』(2014),『일본 사상을 다시 만나다』(2014),『일본 사상을 만나다』(2010), 역서로는 『중국인의 의상과 풍속』(2024), 『쌍전』(한순자 공역, 2012),『논어징』(임옥균 등 공역, 2010), 등이 있다.
목차
1. “자제분들 삭발이나 금하시지요.”
2. 주자학의 전래와 후지와라 세이카
3. 라잔의 성장과 출세
4. 학문의 쇼군 집안 린케(林家)
5. 라잔의 고민과 조선학자의 비판
6. 라잔의 공로와 사상적인 개성
7. 하야시 라잔 연보
본문내용
조선통신사가 남긴 기록 가운데에는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 1657)이나 그 자손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1643년에 통신사로 다녀 온 조경(趙絅)의 기록에서 재미있는 부분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당시 조경은 59세였고 라잔은 62세였다. 라잔의 직책은 막부의 민부 경(民部卿, 내무장관)이었는데, 각종 문서나 외교 서찰의 작성 등 외교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당시 일본 내에서는 최고의 학자로 명성을 떨 치고 있었다.
조선의 사절단은 477명으로 1643년 4월(음력)에 부산을 출발하여 같 은 해 10월에 귀국하였다. 이 모든 사절단의 접대도 라잔의 소관 아래에 있었다. 라잔은 조경을 직접 만나러 오지는 않았지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서 환영의 인사와 가르침을 요청하였다. 조경이 처음 본 라잔의 문 장은 화려하고 수사가 많았으나 내용은 별로 볼 것이 없었다.
조경이 에도에서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에도 라잔은 몇 차례나 사람을 보내서 기념으로 서신을 남겨달라고 간청했다. 조경은 잠시 망 설였지만 인사치례일지도 몰라 거절하고 에도를 떠나, 귀국 길에 올랐 다. 그러나 라잔은 그 뒤에도 사람을 보내 계속 간청하였기에 비로소 마음을 열고,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적었다.
“(앞부분 생략) 관혼상제(冠婚喪祭) 네 가지는 모두 오상(五常, 오륜) 중에서 저절로 나온 것입니다. 거짓으로 만들어 그럴 듯하게 벌여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천리(天理)에서 우러난 절차이므로 자사(子思) ㆍ맹자(孟子) 이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등 여러 현인(賢人)들이 힘 을 들여 서책 한권을 만들어 후학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이제 귀하는 큰 뜻을 세워 정주(程朱)를 독실하게 믿고 또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 있는데, 귀하의 두 아들을 보니, 오뚝한 머리에 머리칼이 하나도 없이 다 깎았으니 열아홉 살 관례(冠禮)에 ‘신체발부(身體髮膚) 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라, 감히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중 략>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