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양군의 역사
청양군의 목면 지곡리 · 대평리와 운곡면 후덕리에서 지석묘· 입석(立石)· 석기 등이 발견되어 청동기시대에 원시농경사회가 정착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구로국(狗盧國)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어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 설치되었고, 지금의 정산면 지역은 열기현(悅己縣) 또는 두릉윤성(豆陵尹城)이라 했다. 지금 청양읍에 있는 우산성(牛山城)은 백제 때 축성된 것으로 성 안에서 신라 토기편과 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다. 또한 청남면에서 발견된 백제 와요지(瓦窯址)에서는 기와를 구워 왕도인 사비성으로 수송했다고 한다.
삼국 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고량부리현을 청정현 또는 청무현이라 개칭해 임성군(任城郡 : 지금의 大興)의 영현(領縣)으로 했으며, 열기현은 열성현(悅城縣)이라 고쳐 부여군의 영현으로 했다.
고려 초에 청정현을 청양현으로, 열성현을 정산현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1018년(현종 9)에는 청양현을 천안부에, 정산현을 공주에 소속시켜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그 뒤 청양현은 홍주(洪州 : 洪城)에 영속되었고, 정산현에는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1395년(태조 4)청양현에도 감무가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고치는 규례(規例)에 따라 청양현과 정산현에 모두 현감이 파견되었다. 1668년(현종 9)청양현을 정산현에 합하고 명칭도 정양현(定陽縣)으로 고쳤다가 1674년에 다시 청양현과 정산현으로 분리하였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이 있다.
1895년(고종 32)청양현과 정산현을 각각 청양군과 정산군으로 개칭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산군을 청양군에 편입시켰다. 한편,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지방에서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켰다가 잡혀 순국하였다. 뒤에 유림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913년 목면 송암리에 모덕사(慕德祠)를 세웠고, 1973년에는 군민들이 대치면 대치리에 선생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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