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산시의 연혁 금강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왔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다. 백제시대에는 열야산현(烈也山縣), 진악산현(珍惡山縣)을 포함했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과 가지내현(加知柰縣)을 포함했던 덕근군(德近郡)의 2개군에 속하였다.
- 최초 등록일
- 2024.02.22
- 최종 저작일
- 2024.02
- 3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소개글
"1. 논산시의 연혁 금강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왔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다. 백제시대에는 열야산현(烈也山縣), 진악산현(珍惡山縣)을 포함했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과 가지내현(加知柰縣)을 포함했던 덕근군(德近郡)의 2개군에 속하였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논산 개관 2
Ⅱ. 강경 미내다리와 논산 원목다리 4
Ⅲ. 계백묘 7
Ⅳ. 견훤묘 11
Ⅴ. 개태사(開泰寺) 14
Ⅵ. 논산 쌍계사(雙溪寺) 19
Ⅶ. 관촉사(灌燭寺) 23
Ⅷ. 돈암서원(遯巖書院) 29
본문내용
Ⅰ. 논산(論山) 개관
1. 논산시의 연혁
금강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왔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다. 백제시대에는 열야산현(烈也山縣), 진악산현(珍惡山縣)을 포함했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과 가지내현(加知柰縣)을 포함했던 덕근군(德近郡)의 2개군에 속하였다. 또 660년(의자왕 20)에 백제의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와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대가 황산벌을 중심으로 백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다.신라시대에는 황등야산군을 황산군으로 고쳐 덕은군(德殷郡), 황산군(黃山郡) 2군으로 개칭되었으며, 열야산현은 니산현(尼山縣)으로, 진악산현은 석산현(石山縣)으로, 가지내현은 시진현(市津縣)으로 개칭되었다. 원래 은진은 백제의 덕근군이였는데, 신라 경덕왕 때 덕은(德殷)으로 고쳤다.고려 초에 이르러서는 황산을 연산으로, 덕은(德殷)을 덕은(德恩)으로, 석산(石山)은 석성(石城)으로 고쳤다. 특히 왕건은 황산에서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아 삼한을 통일한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라 하여 황산을 천호산이라 부르고 그 밑에 개태사를 지었다. 1018년(현종 9)에는 예산·은진·노성이 시진현과 함께 공주에 속했다. 조선시대인 1397년(태조 6)에 덕은·시진을 합쳐 덕진(德津)으로 하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연산군(連山郡)을 연산현(連山縣)으로, 1419년(세종 1)에는 덕은군을 은진현으로 개칭하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니산현과 석성현은 계속 유지해 오다가 영조 때 니산(尼山)을 니성(尼城)으로, 정조 때 노성현(魯城縣)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12년 4현을 4군으로 변경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