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풍수지리란?
2. 풍수의 기본논리
3. 풍수의 분류
4. 풍수지리의 역사
5. 풍수지리의 특성
본문내용
4. 풍수지리의 역사
① 고려시대까지의 풍수
우리나라에 언제 풍수지리 이론이 도입되었는지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선덕여왕이 여근곡 이라는 산 모양 때문에 백제의 매복군사를 발견하였다는 설화, 신라 제4대 탈해왕이 토함산 위에 올라 초사흗날 달처럼 생긴 지세를 보고 자기가 살 터라고 생각하여 그곳을 사술로 빼앗은 이야기, 고구려․백제의 고분벽화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특히, 실라 원성왕 때에는 <청오경>이 수입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있어 풍수지리가 삼국시대 때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선종과 풍수지리설에 크게 힘입어 나라를 세운 후, 풍수지리설은 고려시대를 통하여 지속적인 영향력을 확립하였다. 태조의 <훈요십조>는 풍수지리 중시의 대표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사원의 개창(開創)에 관한 제 1조로부터, 모든 사찰 입지를 도선이 정하여준 곳이 아니면 쓰지 말라는 제 2조, 서경(西京)을 귀하게 여기라는 제 5조, 국토에 대하여 순역(順逆)의 관점에서 파악하라는 제 8조 등의 해석은 철저하게 풍수지리적이다.
이후 성종과 현종의 동경(東京) 즉 경주에 대한 지속적 관심, 그리고 문종 이후 꾸준하게 계속되어 온 남경(南京) 즉 서울에 대한 관심은 고려 말까지 계속되며, 서경천도론은 묘청의 난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고려조의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예외없이 풍수지리설이 근저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수지리설이 강력하게 영향을 미쳐왔다고 볼 수 있다.
② 조선시대이후 음택풍수로의 전환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풍수지리에 있어서는 양택풍수가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할 때 당시 국도 후보로 거론되었던 한양․계룡산․개경 등지의 풍수적 입지에 대한 풍수지리가들의 논전은 양택풍수가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화장을 하고 1년 후 매장하는 등 화장이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 정몽주가 주자의 가례에 따를 것을 주장한 이래 조선조에 와서야 <주자가례>에 따라 시신을 염을 한 뒤 관에 넣고 매장하는 유교식 장례가 국가의 기틀로 확립되었다. -제주 의회보-
하지만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매장문화는 조선중기에 와서야 정착이 되었으니 음택풍수가 그리 크게 성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 보다 분명하게 유교국가의 이념이 확립되면서 풍수사상은 양택풍수 위주에서 음택 위주의 묘지풍수로 전환이 된다. 효의 관념이 적극적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죽은 조상을 위한다는 효 사상의 포장 아래 죽은 조상을 통해 살아 있는 후손이 혜택을 입으려는 천박한 발복 소망이 또한 성행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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