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에서 처음 여관(女官)의 이름과 등급을 정한 것은 태조 6년 3월에 조준과 정도전등에 의해 나타난다. 같은 해 4월, 궁인들에게 관직을 줬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때에는 그 인원수가 28명이었다.
그러다가 세종 10년 3월, 내관과 궁관의 제도를 보고했다는 내용으로 이때 여관제도의 기록이 나타나있다. 정1품부터 정4품까지 상급직급으로 왕의 후궁에 해당되며, 정5품은 상궁, 그 이하는 궁녀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상궁은 궁녀들의 최고 직급으로 책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정6품부터 종9품까지 각각 직계에 따른 호칭이 있었으나, 이는 의식 때 직무 분장에만 쓰일 뿐, 평상시에는 ‘상궁’과 ‘나인’의 두 종류로 구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외부인들은 모두를 통틀어 나인이라 지칭할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 자신들은 반드시 상궁과 나인을 구분하여 썼다고 한다. 또한 나인은 ‘내인’이 정음이지만 나인으로 더 많이 불려졌다.
조선시대 중앙 정부의 문관과 무관을 합한 전체 정원은 채 5000명이 안되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궁녀의 수는 684명이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궁녀는 궁궐에서 비중 상 가장 많은 인원수를 차지했으며, 그 하는 일 또한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많은 궁녀들은 각각 지밀, 침방, 수방, 생과방, 소주방등에서 전문적으로 일하였으며 계급에 따라 상궁, 나인, 생각시, 비자, 무수리, 방자등으로 구분되었다. 또한 혹자는 의녀를 궁녀에 포함하기도 한다. 이 많은 궁녀들은 모두 함께 모여서 지내지 않았으며 각각 부서별로 따로 평생을 지냈다.
궁녀의 선별은 각사의 하전인 천민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궁녀는 각 관사의 하전(下典) 만을 뽑아 들인다. 내비(內婢)는 선발하여 충원할 수 있지만 사비(寺婢)는 특별 교지가 없으면 뽑을 수 없다. 양갓집 여자는 일절 논하지 않는다. 양갓집 여자나 사비를 혹 추천해 올리거나 혹 궁녀로 들여보낸 자는 장형ㆍ도형 1년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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