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의 생애와 사상 연구
- 최초 등록일
- 2004.01.16
- 최종 저작일
- 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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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 들어가며
1. 초기 유학 교육과 신학문의 접촉
2. 해외 유학과 근대적 세계관의 형성
3. 연금 생활과 저술
4. 갑오개혁의 실행과 좌절
5. 일본 망명 및 유배 생활
6. 교육 계몽 운동
본문내용
유 길준이 망명에서 귀국한 것은 1907년 8월인데, 이후 그는 일본과의 협조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의 실력 양성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1907년 10월 [사직납품소]에 첨부한 [평화극복책]({전서} 4, 267-283)에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일본의 보호국화의 진의는 '평화'에 있고, 통감 정치는 일본에 의한 한국 외교의 '대변', 내정의 '지도'였다. 따라서 한국도 '평화'로 이에 응하면서 동시에 한국도 부강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 길준이 이렇게 말한 배경에는 일본의 대한 정책에 대한 그의 정세 판단이 반영되어 있다. 즉, 유 길준이 [평화 극복책]을 썼을 때는 헤이그 밀사 사건(1907년 6월) 직후이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대한 정책으로서 '자치 육성 정책'이 시작된 직후의 시기인데, 헤이그 밀사 사건과 의병 운동으로 일본의 (조선) 즉시 병합론자가 득세해서 일본이 (조선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파멸되고 (문명화를) 도우려는 마음이 철폐되는 계기가 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일본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건백서]를 제출하여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이해를 촉구하였다({전서} 4, 347-348쪽).
이미 국권 상실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유 길준은 청국으로부터 조선의 자주 독립을 인정해준 일본의 '의리'에 한 가닥 희망을 갖고 거기에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유 길준은 을사 보호 조약에 대하여 "(그) 모두(冒頭)에 특히 부강을 언급한 것은 바로 한국을 염려하는 일본의 본의로서 한국을 아끼는 진정의 표현"이며, "일본은 한국을 부강의 길로 인도할 것이며, 한국이 부강해지면 일본은 물러나게 될 것이고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천하의 세(勢)는 시(時)에 따라 변하고 만국의 정은 사안에 달라진다"고 믿고, 우선 우리 나라를 스스로 지킬 힘, 우리의 외교와 내치를 자행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과의 조약을 "성심"으로 지켜야 하고, 그런 뒤에 일본이 성심으로 준수하는 것을 바랄 수 있으며, 그들의 의혹을 사지 않는 것이 버마가 영국에 당한 경우처럼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면하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