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한이 묻어있는 수원 화성을 실제 답사한 후 작성한 리포트입니다.
정조가 처했던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왕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정조의 입장에서 화성의 건축물과 구조를 해석하여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본 리포트는 단순히 교과목을 넘어서서 학내 인문학 답사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글입니다. 수원 화성에 대한 자세하고 새로운 시각의 해석을 찾고 계신 분들에게 추천 드립니다.
수원화성과 정조를 생각하면서 처음 든 생각은 1학기에 들었던 ‘한국사속의 왕과 왕실’ 수업이었다. 정조와 그의 부모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는 매 수업시간마다 특별했다. 조선왕조 오백 년간 이 세 사람만큼 파란만장하고 애달픈 삶을 살았지만 끝내는 그것을 이겨낸 왕실인물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수원화성도 특별했다. 경복궁이 정도전에 의해 철저히 설계되었듯이 수원화성도 정조와 정약용에 의해 계산되어 만들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조선을 건국하며 열정을 불태웠을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에게 지지 않을, 새로운 조선에 대한 열의를 가진 정조와 정약용이 새운 화성에 간다는 것이 얼마나 설레어졌는지 모른다. 게다가 이번이 화성의 첫 방문이었다. 한껏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답사를 신청했고 답사가 기다려졌다.
2. 만안교
출발하기 전부터 비가 내렸다. 만안교에 도착하자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쳤다. 만안교를 다리 밑에 내려가서 눈으로 확인했을 때는 ‘왠, 돌다리지?’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다. 만안교는 누가 만안교라고, 문화재라고 알려주지 않는 한 알 수 없을 것 같이 투박스럽고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돌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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