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년〔영조 13년〕~1805년〔순조 5년〕)은 본관이 반남,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 시호는 문도(文度)이며, 조부는 노론의 중진인 박필균(朴弼均)이다. 그의 가문인 반남 박씨는 전통적으로 서인-노론의 명문 가문이었는데, 박지원의 아버지인 박사유(朴師愈)가 관직에 오르지 못한 포의 신세였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손에 양육되었다. 16세가 되던 1752년에 처사(處士)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때부터 박지원은 장인인 이보천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또한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이 이때부터 연암의 평생 문우(文友)가 된다.
젊었을 때는 과거 공부에 매진하기도 했지만, 과거 시험에 뜻이 없어 1761년 사마시에서는 답안지에 고목이나 노송 같은 그림을 그리고 나오기도 했으며, 1765년에도 초시에서는 장원을 차지했지만 복시에서 백지를 제출하고 오기도 하였다. 명망이 높았던 연암의 조부가 사망하자 집안에서는 과거에 나가기를 줄기차게 요구하였으나, 몇 차례 과거 시험을 치른 후 낙방하고 과거 시험을 단념하였다.
청년 시절에는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그는 우울증 치유를 위해 서민 이야기꾼들의 구연을 즐겨 들었는데, 이때 접했던 이야기와 서민의 삶 등을 바탕으로 『연암집(燕巖集)』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린 7편의 소설을 지었다.
그가 원각사 근처에서 살았던 시기에 박제가·이서구·유득공·홍대용·이덕무 등 이른 바 ‘북학파(北學派)’라고 분류되는 인물들과 교유한다.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연암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와 청나라에 존재한다는 신학문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1776년 정조 즉위 후 정조의 측근인 홍국영이 권세를 잡았다. 홍국영은 정적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1차 제거 대상인 홍인한, 정후겸 등과 밀착된 연암의 가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에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하여 그곳에 정착해 은거 생활을 하였다. 연암(燕巖)이라는 호는 이곳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자료의 정보 및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해피캠퍼스는 보증하지 않으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자료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 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의 저작권침해 신고센터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피캠퍼스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아래의 4가지 자료환불 조건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오류
중복자료
저작권 없음
설명과 실제 내용 불일치
파일의 다운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일형식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