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문서(hwp)가 작성된 한글 프로그램 버전보다 낮은 한글 프로그램에서 열람할 경우 문서가 올바르게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최신패치가 되어 있는 2010 이상 버전이나 한글뷰어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개글
"[한문학작가론] 연암 박지원과 그의 문학"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연암의 생애
2. 연암 문학의 시대적 배경
1) 영·정조 시대(英·正祖 時代)
2) 북학파(北學派)
3) 문체반정(文體反正)
3. 연암의 문학론
4. 작품선
1) 『열하일기(熱河日記)』선(選)
2) 산문선(散文選)
3) 소설선(小說選)
4) 시선(詩選)
5. 맺음말
본문내용
1. 연암의 생애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년〔영조 13년〕~1805년〔순조 5년〕)은 본관이 반남,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 시호는 문도(文度)이며, 조부는 노론의 중진인 박필균(朴弼均)이다. 그의 가문인 반남 박씨는 전통적으로 서인-노론의 명문 가문이었는데, 박지원의 아버지인 박사유(朴師愈)가 관직에 오르지 못한 포의 신세였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손에 양육되었다. 16세가 되던 1752년에 처사(處士)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때부터 박지원은 장인인 이보천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또한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이 이때부터 연암의 평생 문우(文友)가 된다.
젊었을 때는 과거 공부에 매진하기도 했지만, 과거 시험에 뜻이 없어 1761년 사마시에서는 답안지에 고목이나 노송 같은 그림을 그리고 나오기도 했으며, 1765년에도 초시에서는 장원을 차지했지만 복시에서 백지를 제출하고 오기도 하였다. 명망이 높았던 연암의 조부가 사망하자 집안에서는 과거에 나가기를 줄기차게 요구하였으나, 몇 차례 과거 시험을 치른 후 낙방하고 과거 시험을 단념하였다.
청년 시절에는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그는 우울증 치유를 위해 서민 이야기꾼들의 구연을 즐겨 들었는데, 이때 접했던 이야기와 서민의 삶 등을 바탕으로 『연암집(燕巖集)』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린 7편의 소설을 지었다.
그가 원각사 근처에서 살았던 시기에 박제가·이서구·유득공·홍대용·이덕무 등 이른 바 ‘북학파(北學派)’라고 분류되는 인물들과 교유한다. 이들과의 교유를 통해 연암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와 청나라에 존재한다는 신학문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1776년 정조 즉위 후 정조의 측근인 홍국영이 권세를 잡았다. 홍국영은 정적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1차 제거 대상인 홍인한, 정후겸 등과 밀착된 연암의 가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에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하여 그곳에 정착해 은거 생활을 하였다. 연암(燕巖)이라는 호는 이곳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참고 자료
· 박기석, 「연암 박지원의 문학론」, 『국어교육』 110, 2003.
· 김동석, 「『熱河日記』의 서사적 구성과 그 특징」, 『한국실학연구』 9, 2005.
· 박기석, 「〈예덕선생전〉과 정덕(正德)사상」, 『고전문학과 교육』 14, 2007.
· 김수현, 「연암소설의 민속적 성격 고찰」, 『인문학연구』 39, 2010.
· 김수현, 「연암 박지원의 시에 나타난 회화성 연구」, 『인문학연구』 41, 2011.
· 신상필, 「연암 박지원의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를 통해 본 조선후기 해외인식」, 『한국고전연구』 27, 2013.
· 박수천, 「朴趾源의 詩文學論과 詩文學」, 『동남어문논집』 37, 2014.
· 박수천, 「燕巖 朴趾源의 漢詩文學」, 『석당논총』 61,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