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여항인 시조에 대한 비판적 검토 (내용 매우 고퀄)
- 최초 등록일
- 2022.06.02
- 최종 저작일
- 2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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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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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여항인이란
2. 여항인의 등장 배경
3. 여항육인
4. 여항육인 작품세계의 양면성
5. 여항육인 시조의 양면성으로 본 전환기적 특성
6. 여항인 시조의 전환기적 특성과 방향
7. 결론
본문내용
0. 여항인이란
여항(閭巷)이란 ‘인가(人家)가 모여 있는 곳’, ‘서민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런 여항에 거주하는 사람을 여항인이라 한다. 이 말은 일반명사로서 시대에 관계없이 널리 쓰였으나 조선 후기 문헌에 자주 나타나는 여항이란 말에는 구체적인 사회상이 반영되어있다. 이들은 ‘여항’인 대신 ‘위항’인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좁은 길이나 좁은 골목길’을 뜻한다. 즉 민가의 초라함을 일컫는 것이다. 조선 사회와 관련짓자면 이는 서울의 비양반층의 생활공간을 의미하며 곧 중인 이하의 신분 계층이 사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항인(委巷人), 여항인(閭巷人)은 양반 사대부 계층과 일반 서민 사이의 중간 계층으로 주로 서울에 거주하는 중인, 서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여항이란 어휘에 내포된 ‘서민이 모여 사는 마을’이란 다름 아닌 도시의 주거지를 가리키며, 여항이란 어휘에는 조선 후기 서울이 경험한 변화, 즉 양반 중심의 도시에서 비양반층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성장해갔던 시대적 변화가 반영되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항층은 사회변화 속에서 의미있는 계층으로 대두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창출된 위항문화의 한 갈래가 바로 위항문학이다.
0. 여항인의 등장 배경
조선 시대 후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농업이나 상업 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하여 조선 사회에 급격한 생산력의 발달이 시작된다. 이에 조선시대 전기까지 잘 유지되던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신분질서에 혼란이 생긴다. 농사법의 발전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으로 부를 축적한 양민들의 숫자도 급격히 증가했고 그 결과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보듯 족보를 거래하여 신분을 사고파는 일들도 생겨났다. 뿐만 아니라 왜란과 호란, 거듭된 흉년으로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나라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공명첩을 발행하였다. 이는 돈을 내는 사람의 이름을 빈칸에다 써서 관직을 주는 식이었다. 이러한 결과, 양반의 수효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양반은 몰락의 과정을 밟기 시작한다. 하지만 양반의 가치가 떨어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양반이 되어야 ‘사람 취급’을 받고 살 수 있는 사회였고, 그 양반에 가장 가까운 신분이 중인이었다. 이들은 사적인 무역 등의 방식을 통하여, 대다수 사대부를 능가하는 경제력과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